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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감보다 더 한 것

by 책방별곡

8년 만이었다. 독감이라는 불청객이 예고도 없이 내 몸을 덮친 것은. ​눈을 떴을 때 몸은 이미 내 것이 아닌 듯했다. 중력을 몇 배로 늘려놓은 듯한 무거움이 전신을 짓눌렀고 이불 밖으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하필이면 병원 문이 닫힌 일요일이었다. 해열제 몇 알에 의지해 보려 했지만 열은 이미 내 몸의 한계치를 넘나들고 있었다. 머리통 전체가 지끈거리는 통증에 갇혀 침대 위에서 한 번 뒤척일 때마다 십 년씩 늙는 듯했다.


​집 안은 고요했다. 방문 너머 아이의 방에서는 간간이 책장 넘기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왔다. 시험 기간이라 집중하고 있을 녀석이다. 평소라면 기특하게 여겼을 그 소리가 그날따라 유독 아득하게 멀리 느껴졌다. ​남편은 “독감이면 마스크 써라. 나는 옮으면 안 되니까.”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내가 누워 있는 안방 문턱을 거의 넘어오지 않았다. ​머리로는 안다. 딱히 잘못한 사람은 없다. 아이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남편은 가장으로서 아프면 곤란해지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내가 그들에게 “물수건 좀 가져다줘”라고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한 것도 아니었다. ​그 당연한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부르르 떨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열이 올라서 온몸이 불덩이 같다가도 순식간에 오한이 들어 서늘해지는 반복 속에서 누군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 이마에 손이라도 한 번 얹어줬으면 하는 간절함이 피어올랐다. ​서운함은 그렇게 열과 함께 차올랐다.
그들의 무심함이 미운 게 아니었다. 그 무심하고 평온한 일상들 사이에 오직 나만 시름시름 앓으며 홀로 섬처럼 놓여 있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외로웠다.


​몸이 끓어오르는 와중에도 머릿속으로는 질문이 되풀이됐다.
‘나는 누군가에게 묵묵히 물수건을 올려주는 사람이었는데, 정작 내가 아플 때는 기댈 사람이 없는 건가.’
​타인을 돌보는 일에는 익숙했으면서 정작 스스로를 돌보는 일에는 무력했다. ​밤이 깊어가고 해열제로 체온이 조금씩 내려갈 때쯤이었다. 더 이상 누군가를 기다려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휘청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욕실로 향했다. 스스로 세면대에 물을 받고, 수건을 적셔 물기를 짰다. 손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대충 짠 수건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 그 축축하고 미지근한 수건을 이마 위에 올렸다.
“차갑다….”
물수건의 감촉이 이마에 닿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지며 코끝이 시큰해졌다. 누군가의 다정한 손길 대신 나는 내 손으로 나를 덮어주었다.


부자에 대한 서운함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었다. 다만, 펄펄 끓던 몸이 식어가듯 마음의 열기도 조금씩 힘을 잃어갈 뿐이었다. ​아침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방문을 열고 나갈 것이다. 그들은 무심하게 밥을 먹고 학교와 회사로 향하겠지. 그 변함없는 풍경 속에 섞여들겠지만 오늘 밤 혼자 닦아낸 눈물과 식은땀의 감촉은 아마 꽤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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