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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거리 소설가 Sep 25. 2024

(에세이) 노인과 바다와 헤밍웨이

 며칠 전, 따분한 주말 아침을 보내고 있는데 갑작스레 책 한 권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운동복바지만 급하게 입고 책방을 찾았다. 서가 사이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책들을 살피는 중에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책이 눈에 들어와 고민도 없이 구매했다. 그 책을 구매한 이유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인지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책이 생각보다 얇아 주말 동안 편하게 읽기 좋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책을 사들고 집으로 가서 책의 첫 장을 폈는데, 그 내용이 재밌고, 호흡이 빨라 앉은자리에서 해가 채 넘어가기도 전에 노인과 바다를 모두 읽었다

   

 노인과 바다는 노령의 어부 산티아고가 84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하자 젊은 어부들이 그를 조롱하며 시작한다. 그런 산티아고 옆에는 그에게 낚시를 배운 마놀린이란 젊은 소년이 있는데, 그 소년만큼은 산티아고가 틀리지 않았음을 믿어 의심치 않고, 가족의 반대가 있음(추정)에도 산티아고의 배에 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산티아고는 마놀린의 처지를 고려함과 동시에 젊었을 적 자신의 신념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이기 위해 홀로 배에 오른다. 운이 좋았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청새치가 바늘에 걸리지만, 그 청새치를 들어 올릴 힘이 없던 노인 산티아고는 낚시 바늘에 걸린 청새치가 이끄는 데로 먼바다까지 나가 장장 3일 동안 사투 버린 끝에 잡는다. 하지만 400kg 이상의 청새치를 배에 올릴 여력이 없던 산티아고는 배 옆에 묶은 채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이를 바로 실행에 옮긴다. 그런데 너무 먼바다까지 나왔던 탓일까? 청새치가 흘린 피가 돌아가는 길에 있는 상어들에 표적이 되었고, 산티아고가 힘을 다해 그들을 물리치려 노력을 했음에도 해안가에 도착했을 때, 산티아고의 배에 묶여 있는 청새치는 머리만 멀쩡하고, 몸통은 앙상한 뼈만 남게 된다.    

  

 소설은 다양한 주제로 해석이 가능하다. ‘자연’에 포커스를 맞춘다면, 급격한 산업화 속에서 자연을 경시하는 경향에 대한 비판으로도 볼 수 있고, 혹은 너무 ‘자연’에만 집착하다가는 ‘결국 이루지 못한다 ‘라는 반대적 해석도 나올 수도 있다. ‘산티아고’ 노인에 초점을 맞추면, 결과야 어쨌든 그 노인이 청새치와 싸웠고 그의 신념이 ‘맞았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반대로 그 노인의 고집스러움이 결과적 실패를 가져온 것이라는 상반된 의견이 나올 수 있다. 어떤 관점에서 이 소설을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오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볼 때 헤이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통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본다.     

 

 헤밍웨이는 1988년 출생해서, 1926년 ‘봄의 급류’라는 첫 소설을 집필하고, 젊은 나이부터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1926년), ’ 무기여 잘 있거라‘(1929년),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년) 등 기라성 같은 소설들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소설계에서 거장으로 군림한다. 하지만 그 후에는 뚜렷한 행보를 보이지 못했다. 젊은 소설가들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뜻대로 글이 써지지 않고, 10년 만에 야심 차게 내놓은 작품 ’ 강을 건너 숲 속으로‘(1950년)는 평단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서, 그를 한물간 소설가 취급까지 받게 했다. 명예를 먹고사는 소설가로 써는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그 후, 헤밍웨이가 쿠바에 머물 적, 어느 어부가 ’ 자신이 53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하다가 6마리를 낚았는데, 돌아오는 길에 상어에게 모두 먹혀버렸다 ‘라는 무용담을 듣고는 이를 모티브 작심하고 집필한 소설이 ’ 노인과 바다‘(1952년)이다.      


 노인과 바다에는 헤밍웨이가 당시 느꼈을 감정들을 소설에 녹였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내용들이 등장하는데, 작중 주인공이자 노쇠한 산티아고가 젊은 어부들에게 조롱받는 내용은 몇 년째 대작을 내놓지 못하고, 모든 것을 쏟아부어 집필한 소설도 평단에 좋지 못한 자신을 대변하는 내용으로 보이고, 중간에 산티아고가 자신의 무력함을 비관하며, 과거 젊었을 시절 항구에서 가장 팔씨름을 잘하는 흑인과 저녁부터 다음날 날이 밝을 때까지 팔씨름을 해서 이긴 과거 회상장면은 과거의 영광에 있던 헤밍웨이의 지금의 초라한 말년에 대한 한탄으로 보인다. 그리고 산티아고가 젊은 소년 마놀린의 도움을 여러 차례 거절하는 내용은 자존심이 강한 그의 내면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이렇듯 헤밍웨이는 자신을 투영해서 소설을 집필했다.    

  

 그런데 결말부에는 상어들에게 자신이 잡은 물고기를 거의 다 내줄 수밖에 없었다. 헤밍웨이의 소설 대부분이 허무주의 토대로 집필이 되었기 때문에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말이기는 하지만, 작품이 헤밍웨이의 현재가 반영이 되어있다고 생각하면 여간 쓸쓸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다 잡아 먹혀버린 청새치처럼 자신의 결말도 허무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런 점을 고려해서 작품을 감상한다면 소설가로서 절벽 끝에 선 헤밍웨이의 기분을 십분 이해가능하다.   


 하지만, 소설은 소설의 결말과는 다르게 평단과 대중에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출간하자마자 500만 부 이상 팔려나가며 다시 한번 전성기가 왔다. 평단은 연일 찬사했고, 헤밍웨이가 작가로서 돌아왔음을 알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작품과는 다르게 온전한 청새치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근데, 그런 것이 독이 되었을까? 평단과 대중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린 그는 노인과 바다 이후 뚜렷한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내가 읽은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가 출간하기 전까지의 그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작품을 이해하게 되면, 그 소설이 대중과 평단에 선택을 받은 이유는 그 당시 사람들도 헤밍웨이처럼 상실과 좌절을 겪었으며 또 한 번의 도약을 기다리고 있지는 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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