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늘 해남으로 떠날 예정입니다”
태수가 세 들어 사는 주인집 딸 미진에게 이야기했다. 미진은 태수의 말에 댓 구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벌리고, 눈만 끔뻑거릴 뿐 도통 이 남자가 왜 자기한테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떠올리지 못했다. 태수는 잠시 미진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미진이 아무 말이 없자 좀 더 살을 붙여 이야기했다.
“저는 오늘 해남으로 떠나서, 그곳에서 정착하려 합니다. 어부 같은 것도 될 수 있습니다”
태수는 이야기를 마치고는 안경을 검지로 치켜올렸다. 안경이 제대로 태수의 눈앞에 멈추자 그는 자기 말에 당황하며, 볼을 붉게 밝히는 미진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미진은 여전히 그를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불현듯 이야기했다.
“네, 바로 떠나시나요? 퇴거 문제면, 어머니를 불러드릴까요?”
“아닙니다. 저는 미진 씨한테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저한테요?”
미진은 태수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리고 다소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빤히 쳐다봤다. 태수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반응을 보이는 미진을 보고는 주춤하며, 발을 빼고는 아까와 달리 조심스럽게 답했다.
“제가 떠나가는 것을 미진 씨에게 가장 먼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진은 태수의 의외의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되물었다.
“왜, 태수 씨가 떠나는 것을 저에게 이야기하시는 거죠?”
이번에 태수는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아까보다 더 위축된 목소리로 미진의 말에 대답했다.
“그거야... 우리가 진지한 관계로 발전하는 중이었으니 이야기드리는 겁니다”
이제야 미진은 태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리고 바로 표정을 일 그리며, 그에게 쏘아붙였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요. 태수 씨가 우리 집 2층 방 한 칸에 1년 간 살면서 저와 마주친 적도 별로 없으시고, 말해본 적도 별로 없으신데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모르겠네요...”
미진은 돌발스러운 상황에 태수에게 따지듯 물었으나, 이후 이성을 되찾고 다시 평소와 같은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 미진은 사실 태수를 잘 알지 못했다. 아는 정도는 나이가 자기보다 10살이 많고,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 방 안에서 거의 나오지 않고 두문분출 한 다는 것뿐이었다. 미진은 처음에야 셋방 남자에게 호기심이 있었지, 이내 없어졌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는 2층에 대한 관심을 아예 끊은 참이었다.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한 미진은 자신 앞의 남자가 어떤 연유로 그런 생각을 갖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궁금했다. 하지만 아까와 마찬가지로 태수는 자신과 다른 생각의 미진을 울먹거리며 쳐다보기만 할 뿐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아 괜한 입술만 오므렸다가 폈다가만 반복했다. 태수가 말을 하지 못하고 목석처럼 서있기만 하자, 이번에는 미진이 채근하듯 물었다.
“어째서 저랑 진지한 관계로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하신 건가요?”
미진은 호기심 반, 걱정 반의 감정으로 물었으나 상대를 최대한 편하게 해 주기 위해 말끝을 내리며 배려했다. 그때서야 태수는 긴장된 얼굴이 조금 풀리며 말문을 열 수 있었다.
“두 달 전, 저는 답답한 마음에 집 옥상으로 올랐습니다. 그리고 담배를 폈죠. 그때, 미진 씨가 빨래를 걷으러 오셨던 것 기억납니까?”
“네, 기억납니다”
“그때, 미진 씨가 제게 밝게 인사했고, 저도 인사를 드렸었죠. 그리고 그날은 저녁노을이 유난히도 아름답던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미진 씨에게 ‘저녁노을이 참 아름답네요’라고 하자, 미진 씨는 제게 ‘그러네요. 태양이 내리고, 달이 오르는 게 묘하면서도 멋지고, 때로는 슬픈 감정이 드는 것 같아요’라고 하셨죠?”
미진은 태수의 말을 듣고 곰곰이 그날을 떠올렸으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미진 입장에서는 세입자가 말을 했기 때문에 그냥 아무 말이나 하고 예의나 차리고 내려갈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태수는 미진이 바로 답하지 않자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때, 제가 미진 씨에게 말했습니다. ‘묘하고, 슬픈 감정이란 어떤 것인가요? 저는 책상 앞에서 공부만 하다 보니까 감수성이 말라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자 미진 씨가 제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랑을 해보세요. 꼭 누구와 사귀지 않아도, 누구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갖는다면 묘하고, 슬프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답니다’, 그리고 저는 마지막으로 말했죠. ‘저 같은 것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미진 씨가 ‘그럼요’라고 답하며, 제게 웃어주셨습니다. 그때의 미진 씨의 그 미소는 미진 씨가 붉은 노을을 바라보는 묘하고, 슬픈 감정이 서려있는 그 미소와 동일했습니다 “
미진은 태수의 말을 듣고, 입이 떡 벌어졌다. 너무 이상한 소리를 들어서 어디서부터 해명해야 할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태수에게 물었다.
“상당히 당황스럽네요. 태수 씨는 제가 그날, ‘묘하고, 슬픈 감정’이 서려있는 웃음을 당신에게 보냈기 때문에,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 건가요?”
미진의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태수는 거침없이 답했다.
“네, 미진 씨의 그때의 그 미소는 저를 사랑한 미소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잠깐씩 마주쳤을 때도, 제게 같은 미소를 보여주셨죠.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미진 씨의 그 미소는 나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내가 가난한 학생이고, 나이차도 많이 났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마음에 다가올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사랑을 제게 최대한 피력하기 위한 노력’으로요. 마치 붉은 노을이 내리는 ‘묘하고, 슬픈 감정’이 서려있는 그런 미소였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저는 연예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죠. 미진 씨가 나를 좋아하는 것은 100% 로인데 다가가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거리로 나가 카페에서 커피도 마셔봤습니다. 수많은 연인들 틈바구니 속에서 홀로 앉아 있으니 꽤 처량하더군요.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서로가 사랑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 미진 씨가 여러 이유로 용기 내지 못한다면, 제가 용기내기로요. 그래서 오늘 같이 떠나자고 한 것입니다. 어차피 미진 씨 부모님도 저를 마음에 안 드실게 뻔 하니 제가 떠나자고 하면, 당연히 따라 나오실 줄 알았습니다”
숨도 쉬지 않고 태수는 말을 마쳤다. 미진의 표정은 더욱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의 착각 속에 살고 있는 이 불쌍한 남자를 위해 정확하게 이야기해 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저기요. 태수 씨, 두 달 전 ‘붉은 노을’을 보고 아무 말이나 지껄인 건, 세입자에 대한 예의였고요. 오며 가며 미소 지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공부만 하셔서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 것 같으세요. 아쉽지만, 저는 태수 씨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이만 돌아가 주세요”
미진은 발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태수는 돌아서는 그녀를 잡지 못했다. 아니, 잡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사실이 모두 꿈만 같다고 생각했다. 어젯밤, 자리에 눕기 직전까지도, 그녀와 함께 맞을 새날들이 그의 머릿속에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인지부조화에 태수는 자신의 발조차 그곳에서 떼지 못하고 있었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부르기 전까지 말이다.
“아유, 총각 여기서 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