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닫고 잠자리에 든 지 며칠이 지났다. 만나는 사람들이 지난여름은 무척 더웠다고 하는 것으로 인사를 건네곤 한다. 그럴 때마다 어느 소설가의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라는 작품 제목이 떠올랐다. 그렇다, 지난여름은 덥고도 더웠다. 아직도 한낮은 뜨겁다. 가을이 되었는데 왜 이렇게 아직도 더우냐고 묻던 열두 살 소녀였던 내게 할머니는 말했다. 벼가 익느라 그런다, 그래야 곡식이 여무는 겨. 그 말은 평생 내 뇌리에 박혀 있다. 그래서 그럴까, 한낮 더위가 싫지 않다.
저녁 산책할 때 풀벌레는 더욱 요란하게 울어댄다. 길가 벚나무 잎사귀는 누렇게 물들고 또는 조락하기도 한다. 보도에 떨어진 잎을 보며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한층 높아진 하늘이 가끔 보이기도 하고, 고추잠자리가 천변에 서서 한들거리는 갈대 위를 날기도 한다. 세잎쥐손이꽃이 앙금앙금 피어나고 달개비와 여뀌 꽃도 어느새 지천이다. 바쁘게 사느라 잊고 있는 사이에.
더운 여름만큼이나 뜨거운 나날을 보냈다. 이제 웬만큼 급한 일은 마무리하고 나니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글이라고 해봤자 잡문이지만. 하지만 그 잡문의 힘은 세다. 그동안 처리한 일들이 모두 소논문이나 학회 발표문 또는 다양한 유형의 원고를 쓰는 일이었는데, 그것을 해낼 수 있었던 건, 잡문 쓰던 힘 덕분이다. 그러니 잡문은 힘이 세지 뭔가.
일상의 자잘한 글감 가운데 하나를 붙잡고 쓰는 완성도 낮은 글이지만 늘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건 멋진 일이다. 알게 모르게 쓰기 근육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것을 믿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실제로 드러나는 걸 경험하고 나니 글쓰기를 꾸준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그렇게 쓰는 것에 근육이 생기면 거칠 게 없으리라. 근육의 정도가 앞으로 글쓰기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 건 당연하다.
아무튼 그렇게 당면한 일을 정신없이 하다 보니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더니 갈 것 같지 않던 무더위도 가고 있다. 올 가을에는 글을 더 많이 써야겠다. 정격적인 글을 쓰면서 이렇게 흐지부지한 글을 얼마나 쓰고 싶었는지 모른다. 수다처럼 늘어놓던 글을 쓰지 못하면서 갈급하기도 했다. 숱한 글쓰기 플랫폼을 장식한 글들이 더욱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어떠랴, 잡문이면. 어떠랴, 수준 있는 글이 아니면. 어떠랴, 독자가 적은 글이면. 그러한 글쓰기라도 오래 꾸준히 하다 보면, 내로라하는 좋은 글이 나오지 않을까. 지금 문명을 떨치고 있는 작가들의 글도 처음부터 모두 괜찮은 글은 아니었다. 자꾸 쓰다 보니 좋은 글이 나온 것일 터다. 작가에게 요구되는 건 꾸준한 글쓰기다. 얼마나 대상을 정확하고 보고 이해했는지, 그 안에 깊은 사유를 담고 있는 글쓰기인지 등이 요구되겠지만. 어쨌든 꾸준히 쓰는 글은 힘이 있다. 잡문이라도.
잡초가 강인한 생명력을 갖고 있듯이 잡문도 그러하다. 일정한 체계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쓰는 글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는 잡문, 생각만 해도 자유롭다. 어떤 이가 수필을 잡문이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 있다. 당시엔 수필을 폄훼하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다. 곱씹어보니 썩 기분 나쁠 일이 아니었다.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 마음대로 쓰는 글이라는 것, 얼마나 자유로운가. 또 수필다운가. 저 옛날 장자의 의식과 닮아있다. 비약일까.
아무튼 오늘부터 틈만 나면 잡문 쓰기에 빠져볼 생각이다. 잡문 쓰기의 힘을 경험한 나로선 당연한 일이다. 물론 ‘틈만 나면’이라는 전제가 붙지만. 그러다 정격적인 글을 써야 할 일이 생기면 잡문을 쓰던 힘으로 망설이지 않고 쓰리라. 알게 모르게 생긴 쓰기의 근육으로 해낼 수 있다고 믿기에. 무엇보다 잡문은 힘이 세므로.
이렇게 말부터 하는 이유가 있다. 말에 책임지기 위해 쓰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오늘은 이렇게 잡문 한 편을 쓰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