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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작별

by 최명숙

‘작별’의 사전적 의미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작별을 해야 했다. 그러지 못했으니 뭐라 이름 붙여야 할까. 그렇다고 슬프고 안타깝게 헤어진 것 또한 아니니 석별도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기약 없이 헤어졌으니 ‘생이별’이 적절할까. 그래, 우리는 만날 기약 없이 헤어졌다. 나는 작별을 하고 싶었는데. 내 의도와 달리, 그것도 타인에 의해 생이별을 하다니 원통하고 절통한 일이지 뭔가.


육십갑자 한 바퀴를 돌도록 함께 동고동락했는데, 우리는 인사 한 마디 못하고 헤어졌다. 누가 그렇게 내 몸에 유익을 주었던가, 누가 또 그렇게 행복감을 느끼도록 했던가, 있는 듯 없는 듯 가장 낮은 자리에서 다 썩고 부서지도록 묵묵히 희생했는데……. 고마운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 가슴이 아릿거렸다. 함께 있을 땐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지나고 나서 후회하는 어리석음을 어떻게 해야 하나.


작은 물건 하나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나의 벽(癖) 때문이라고 치부하기엔 적당하지 않다. 물론 언제까지든 함께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작별을 했어야 한다.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건 아무래도 아쉽다. 우리 온이와 또온이는 어렸을 때, 응가를 흘려보내면서도 말했다. “응가야, 잘 가.” 변기 속으로 사라지는 걸 보며 손을 흔들었다. 버려야만 되는 것에도 그렇게 작별을 하는데, 나는 소중했던 대상에게 인사를 못하고 헤어지다니. 온이들만도 못한 나다.


그건 그 사람 때문이다. 그 사람은 나와 하등 상관없는 타인인데, 어째서 그에 의해 우리의 관계가 이리도 섭섭하게 정리되었단 말인가. 사람 사는 일은 제삼자에 의해 문제가 발생되거나 관계 정리가 되는 일이 잦다. 그래서 관계가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 관계에 끼어든 타인이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적어도 상황을 말해줄 수는 있었을 텐데, 아무런 낌새나 언질 없이 생이별을 시켜버리다니.


부글거리는 가슴을 다독거려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얼마 전부터 참는 게 꼭 미덕은 아니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참다 보니 오해를 받는 일이 자주 있었고, 후에 바로잡으려고 하니 마음이 상하기도 해서 생긴 의식이었다. 또 평생 이렇게만 사는 건 내게 성실한 삶의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녕 참을 수 없는 일이 생기면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처음이 힘들지 한두 번 해보니 그것도 괜찮았다. 예전 같으면 품위나 체면을 생각해 못했던 일인데.


결국 나는 작별할 수 없도록 한 당사자, 그 타인에게 말했다. 우리를 왜 생이별시켰느냐고. 그건 너무하다고. 작별할 시간을 줬어야 하지 않느냐고. 타인은 피식 웃었다. 세상에 이별할 것이 쌔고 쌨는데, 그깟 것과 무슨 작별씩이나 하느냐고. 당신에게는 그깟 것일지 몰라도, 내게는 육십갑자 되도록 헌신하고 봉사한 고맙고 소중한 존재라고 하니, 타인은 더 어이없다는 듯 낄낄거리며 웃기까지 했다.


타인은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요긴하게 쓴 사람도 소용이 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리는 세상인데, 이깟 것이 뭘 대단하다고 이 난리인가. 더 튼튼하고 깨끗하고 반짝거리는 것으로 대체하면 될 일인데. 작별을 못했다고 이 성화를 부리는 이 늙은 여자는 도대체 현실감이 있는가, 없는가. 이날 평생 치과 의사 노릇하면서 썩은 어금니에게 작별 인사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는데, 세상에 이상한 사람들이 넘쳐나더니 이 치과에도 드디어 나타났나 보다. 속으로 구시렁대지 않았을까.


그렇다. 아래쪽 가장 안쪽에 있는 어금니, 이제 다 부서져 흔들거리는 어금니를 뺐다. 임플란트를 하기 위해서다. 의사는 뽑은 이를 내게 보여주지도 않고 버렸다고 했다. 작별인사를 해야 하니 꺼내달라고 하자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섭섭한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장난으로 여겼다. 난 진심이었는데. 옆에 있던 간호사도 빙긋 웃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인 걸까.


할 수 없이 속으로 말했다. 육십 년 동안 내게 먹는 즐거움을 주었고, 그 덕에 튼튼한 몸으로 살 수 있게 해 주었으며, 다 썩고 부서지도록 헌신해 준 너를, 호흡이 있는 날까지 가끔 생각하겠노라고, 또 고맙다고. 우리의 작별은 그렇게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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