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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널하우스 Nov 07. 2024

우울한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


우울한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이 있다고 한다. 힘내, 어떤 심정인지 알아, 가족을 생각해, 긍정적으로 생각해, 감정을 다스려야지... [1] 필자는 그보다 더 심한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고약한 사람이다. 한 번은 바에서 위스키를 마시다 지인이 말했다. 나 요즘 우울해. 아무것도 재미가 없어.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중 내가 리액션을 해야 할 타이밍이 왔다. 더 좋은 대답들도 많았을 테지만, 고약한 나는 불편한 인과를 짐작하면서도 기꺼이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고 말았다. 


그런 거 좀 오만한 생각 아닌가? 땡그래진 지인의 눈이 총구처럼 나를 겨눴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오만한 사람인지 어디 한 번 납득시켜 보라는 듯 따가운 눈빛을 쏘아대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우울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정직하게 풀어내는 것뿐이었다. 따뜻한 위로도 효과적인 조언도 아니었을 테지만 다행히 지인의 얼굴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 후에도 한 번씩 다시 찾아오는 것을 보면 나의 이야기가 조금은 도움이 되었던 걸까. 간밤에도 연락이 왔다.


나는 우울을 그 자체로 나쁘게 보지도 않고 오히려 삶의 본질적인 요소로까지 간주하고 있는 편이다. 본질적인 요소라 말하는 까닭은 사람에게 우울은 본성처럼 기본 세팅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심이 많다.(우울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좀 이상한 표현일까) 그 결과 우울을 두 가지 필터로 걸러내게 되었다. 하나는 오만, 다른 하나는 솔직이다. 먼저 오만에 대해서는 노승영 번역가님께서 하신 말씀이 적절해 보인다. '내가 깨끗해질수록 세상은 더러워진다' 


결벽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청결함이 더럽혀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마치 깨끗한 방 안에 먼지가 들어오는 걸 두고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은 자신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불필요한 것들을 외부로 밀어내려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자신과 세상을 철저히 분리시켜 바라봐야만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양자가 서로 완전히 격리된 것이어야만 오염을 막을 수도 때 묻은 것들을 밖으로 내다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트림 되는 세상을 조각내 깨끗이 닦아 박제시키고 싶은 정신적 결벽이 나에겐 오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생활에서 마주하는 자연과 사물들은 단순하고 깔끔하지 않으며 오히려 복잡하고 지저분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는 그러한 복잡함과 지저분함에 '연결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자신을 전부 알 수 있을 만큼 완전한 사람은 없으며, 자신과 외부세계를 단절시켜 생각할 수도 없다. ‘모든 것과 단절된 순수한 나’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순수성을 고수하려는 태도는 내가 깨끗해지려는 만큼 세상을 어지럽히지 않을까.


우리가 '세상은 재미가 없다'라고 결론 내릴 수 있는 이유는, 사실 '세상에 대해 다 안다'는 착각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의심하고 검토하고 성찰하는 지적 긴장을 평생토록 유지한다고 해서 세상을 다 알 수는 없다. 하물며 순수한 나는 지저분하기만 한 길을 굳이 선택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고립무원에서 편해지는 길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오만을 부리는 것이다. 단숨에 내가 세상을 다 안다고 오만을 부려버린다면 이야기는 간단해지기 때문이다.


단순하고 순진무구한 정신은 또렷해서 외부와 연결될 필요도 없다. 오염만 될 뿐이다. 그러나 마음을 결벽하게 하려 하는 것, 순수한 정서만을 남겨두고 모조리 깨끗하게 지워버리려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어리석으며 어떤 면에서는 병리적이다. 우선 그런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가능하다 할지라도, 홀로 남은 순수성은 고독하고 우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끊임없이 구속을 받으며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사르트르는 이를 앙가주망(engagement)이라 표현했는데, 사회 참여, 현실 참여라고도 해석되는 이 용어의 원래 말뜻은 '도박, 담보'이다. 이 단어가 섣부른 판단을 권장하기 위해 간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속단의 꼬리를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유보하고 싶은 간절함이 내겐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냉험한 현실에 아무런 의도나 취향도 고려되지 않은 채 내던져진다. 그렇게 저당 잡힌 자신의 삶은 포기하고 싶어질 만큼 보잘것없어 보일 때가 있다.


사르트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도 삶이 눈물겨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그의 외침은 설령 참혹한 현실과의 도박에 모든 것을 잃더라도 아직 실존이라는 마지막 담보가 남아있다는 처절한 각오이자 자기 각성처럼 내게 들려오기 때문이다. 그는 비루한 삶일지라도 우리가 황망하게 단념하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살아가기를 바랐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무구함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추스르지 못한 마음은 한편에 남게 된다.


다음은 두 번째 필터, 솔직함이다. 나는 세상을 너무도 정직하게 마주한 사람들에게 우울은 불가피한 것임을 느낀다. 사물이나 현상에 입혀진 언어의 껍데기들은 단지 다른 누군가가 마음대로 붙여놓은 이름이며, 결국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화폐도, 시장도, 종교도, 정치도, 국가도 '믿음'이라는 알량한 입장을 거친 시시한 사람들의 합의를 통해 형성된 장난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토록 엉성하게 얽혀 있는 세상의 민낯을 무덤덤하게 지나치지 못하고 백일하에 직면하게 되고 마는 이유를 나는 솔직함 탓이라 해두고 싶다.


정신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한 사람이 우치다 타츠루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녀는 퇴원 후 사회에 적응하려는 사람들의 말동무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 중 일부가 철학적인 질문을 던져 난감했다고 한다. 타츠루는 마음의 병이란 대개 ‘자신이 왜 여기에 존재하는가’, ‘자신은 누구인가’와 같은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없는 정신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마음을 앓고 있는 자는, 이런 유아적인 질문들에 사로잡혀,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는 물음을 실로 정직하게 품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은 그가 운영하는 블로그에 게시된 포스트를 제자 분께서 번역한 일부이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묻는다. ‘어째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이라는 개념을 가질 수 있는가?’ (이는 ‘어째서 <우주의 끝> 같은 것을 본 적도 없는 아이가 <우주의 끝>은 어떤 것인지 고민할 수 있는 일이 가능한가?’라는 질문과 동일하다.) 이러한 철학적 사고를 사용해 어른들은 광기를 능숙히 회피한다. 어떻게 회피할 수 있느냐 하면, 선가와 데카르트 모두 ‘사고가 불가능한 것’에 대해 사고하는 것은 ‘대단히 지적인 태도이기도 하며, 숭고한 행위이다’라는 (실은 전혀 근거 없는) 전제를 뻔뻔한 얼굴로 채용해 버리기 때문이다. 철학이 우리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을 이래저래 고민해 보는 것이 지적 성실의 표징이자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다’라는 ‘거짓말’이다. [2]


우울한 사람이 세상을 정직하게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깊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단지 평범해지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솔직하고 투명한 눈은 대답하지 않는 심연을 응시하면서 그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타츠루는 이 지점에서, ‘어른의 기법’을 통해 평범에 이르는 사다리를 놓는다. 물론 그것은 '거짓말'이지만, ()의 훈련이 대답할 수 없는 문제를 비껴가는 방법이라는 것만큼은 진실일 것이다. 이에 비해, 필자는 우울은 오만한 생각이자 쓸데없는 솔직함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그저 ‘우울한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들’만 늘어놓았다. 그것도 아주 오만하고 솔직하게.


사과 한마디로 모든 걸 마무리하기에는 이미 이야기를 너무 많이 키워버렸다. 평범에 이르는 사다리를 하나라도 꺼내놓지 않는다면, 나의 입장을 참작하기 어려운 게 아닐까 싶다. 권태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존재하듯, 우울 역시 그에 대한 우리의 태도 안에 해답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세상을 오만하게 탈출하려는 것, 끝없는 심연에 솔직하게 무너지는 것, 이 두 가지 방식은 결국 현실을 진실되게 대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예전에 쓴 문장이 있다. 그 행간을 보면, 그때의 나는 분명히 우울했을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바라본다면 태양처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달처럼 바라봐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밝은 대낮 아래 모든 것이 한눈에 살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어둠에 삼켜져 있고, 달 하나 겨우 볼 수 있는 한 밤처럼 말이다. 기대를 비껴가는 일은 흔하다. 모든 것은 완벽하지 않고 완벽하게 알 수도 없다. 우주의 넓은 밤하늘에서 보이는 것은 겨우 달 하나가 전부일테니까. 그럴 때 중요한 것은 내가 세상을 어떻게 가늠하느냐가 아니라 나로 하여금 세상이 어떻게 왜곡되느냐가 아닐까.


나의 사다리는, 세상이 왜곡되기 전에, 나의 사려로 그 왜곡을 멈추게 하는 것이었다. 순수해지려는 오만함도, 마음을 앓고 있는 솔직함도 결국 자신이 왜곡되는 것을 견디지 못한 결과였을 것이다. 내 언어는 나를 넘어서는 의미를 찾아가는 길이 아니라, 나 자신을 바로잡는 일련의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타인의 말과 행동이 내게 미칠 영향을 생각할 때, 그 왜곡을 잠시 멈출 수 있기를 나는 바라왔기 때문이다.


라캉의 <에크리>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언어는 무엇인가를 의미하기 전에 누군가를 위해 의미한다' 또 이런 말도 있다. '인간의 모든 말은 그곳으로 도달하기보다는 그곳으로부터 유래한다' 의미라는 것도 자신에게 일직선으로 빠르게 도달하는 걸 바라지는 않는 것 같다. 그저 자신으로부터 유래하여 떠오르는 것들이 왜곡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다.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의미하기 전에 누군가에게 풍부하게 의미될 수 있도록 말이다.


왜곡되지 않으려 애쓰는 당신을 내가 가늠하지 않는 한, 우울은 좀 더 견딜 만 해지는 것은 아닐까. 세상을 왜곡 없이 바라보려는 우리의 노력은 외부를 정확히 보려는 시도가 아니라, 자신을 바로잡고 내면에서 진실을 찾으려는 과정일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를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어떻게 그 왜곡을 멈추고 세상을 마주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여전히 내 방식으로, 내 생각의 구름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나의 고려가 우울을 혹여 왜곡하지 않을까 사려하면서 말이다.

 

 

refer.

[1] -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정신의학 및 신경학과 교수, 아담 캐플린 박사 [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2217346

[2] - https://ogdb.tistory.com/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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