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를 태우던 중 동료가 불합리한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를 토로하였다. 불투명한 R&R(Role and Responsibilities)과 휴리스틱한 업무처리에 있어서는 답답함을 벗어나기 힘들 때가 더러 있다. 조직이란 게 원체 그렇지 않던가. 일처리, 문화, 관행에 대한 불합리함을 목도하고 있자면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가끔은 부당함마저 차올라 상부에 대한 저항감이 생기기도 한다. 뭔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보려 해도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다.
미국은 노예를 해방하고 인종차별을 잠식시키기 위해 한 세기동안 수많은 피와 눈물을 흘렸다. 최근까지도 'Black Lives Matter'와 같은 우려와 항의는 계속되고 있다.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나라'라는 명제가 상식으로 등록되는 과정도 이러할 판국에, 그 복잡한 회사의 프로세스와 문화를 재정비하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 비용들이 발생할 것인가.
개별적 상황을 보편적인 사건에 환원하여 '인간사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다'라며 시니컬하게 사고를 정지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하나의 국소적인 사안에 매몰됨으로써 발생되는 스트레스 역시 사고를 정지시키는 데 일조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스트레스를 받다 보면 즉각 효력이 발생하는 강단 있는 해법을 원할지도 모른다. 주사기를 꽂고 투약되기만 하면 말끔히 치료가 되어버리는 '소마' 같은 게 이 세상에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역설적인 것은 어떠한 문제에서 연역해 내는 해결의 실마리나 논리보다도 그러한 논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는 희석되어 간다는 것이다. '소마' 같은 건 어쩌면 '스트레스가 풀렸다'라는 결과의 집행보다 '스트레스를 풀어가는' 과정의 연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내 경우를 말하자면, 기분이 유쾌해지기 위해 논리든 사고든 가져다 연료로 사용한다. 그렇게 가열되는 과정에서 남는 건 연기나 재뿐이라 다른 이들에게 전해줄 변변찮은 조언 한마디 남지도 않지만, 이런 것도 나름 스트레스 해소법이라면 해소법이랄까.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우선 감정의 여유부터 찾는 셈이다. 분명한 건 유쾌해진 기분과 함께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면, 문제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문제는 변함이 없다 해도, 이미 나는 변해 있기 때문이다. 문제를 인식하는 내가 변했다면, 문제 역시 변한 게 된다. 문제는 더 이상 예전 문제 그대로가 아니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동료에게 구구절절 이러한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분 좀 풀어'라는 한마디와 술 한잔이면 족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