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는 '기분'을 존재의 근본양식으로 본다. 우리는 매 순간 어떠한 기분에 처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아무 기분이 없음' 역시도 '아무 기분이 없는 기분', 즉 '기분'의 한 분류로 봐야만 한다. 데카르트는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인간의 사고는 멈추질 않는다. 아무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을 때조차, '아무 생각'이 든다. 인간은 생각하는 한(데카르트), 어떠한 기분을 느끼는 한(하이데거) 살아 있다.
어떠한 생각에 머리가 너무 아플 때가 있다. 덩달아 기분도 언짢아지고 마는 그런 골치 아픈 상황은 언제든 찾아온다. 역으로 언짢은 기분이 머리 아픈 생각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하늘이 잘 보이는 건물 옥상이나, 바람이 잘 통하는 바닷가 벤치에 앉아 담배를 꺼낸다. 복잡한 생각과 기분이 내뿜는 연기처럼 서서히 흐려져 가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머릿속의 뿌연 생각은, 마음속의 멀건 기분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다.
하늘이 잘 보이는 건물 옥상이나 바람이 잘 통하는 바닷가 벤치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은 사실, 그러한 생각과 기분을 연소시키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천재들의 사유를 빌리지 않아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생각과 기분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없던 것이 되지 않는다고. 그럼에도 인간은 왜 인적이 드문 고독한 가장자리를 구태여 찾게 되고 마는 것일까. 생각과 기분이 오히려 증폭되는 상황을 왜 스스로 만들게 되고 마는 것일까. 아마도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다른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일 것이다. 인간만사의 연옥에서 잠시 떠나, 드넓은 하늘과 이따금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만끽하며 현미경을 잠깐 내려두고, 망원경을 꺼내 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망원경을 통해 변변찮은 삶의 파도 속에서 그나마 '기분 좋은 생각' 한 줌을 찾아보기 위해서 일 것이다.
'기분 좋은 생각'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어떤 물건이, 어떤 기억들이 색인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경유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검색 알고리즘을 이용해 최소 복잡도, 최단 거리로 인덱스를 찾아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어지간히 각별하지 않는 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니 적당히 기분 좋은 것들을 많이 만들어 놓을 일이다. 슥- 둘러만 봐도 하나 정도는 걸리게끔 말이다.
행복은 농도가 아니라 빈도인 것이다. 빈도라 표현하면 너무도 초라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분 좋은 생각'을 할 때면 혹은 하려 할 때면 떠오르는 것들, 그것들은 더없이 소중하다. 소중하기 때문에 더 많아야만 하는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을 떠올릴 때 '기분 좋은 생각'이 함께 떠오른다면, 소중한 사람이라고 짐작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주변에 많을수록 꼭 그만큼 행복할 것이다. 어쩌면 인간에게 가장 진실된 목표라 할만한 것은 누군가 '기분 좋은 생각'이 필요할 때, 떠오르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까.
고민거리나 걱정거리에 몸서리치는 친구에게 '나가서, 바람이나 좀 쐐'라며 말해본 경험이 다들 '한번쯤은' 있을 것이라 본다. 없다면, 훗날 그런 상황이 오게 된다면 '한번쯤은' 해보시라. 누차 말한 '한번쯤은'은 운이 좋을 때, '한번쯤은' 효과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족이다. 타인을 위로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그것뿐인가, 한탄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고급자 단계가 있다. 그것은 '기분 좋은 생각'이 드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낙차가 심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일과 타인에게 할 수 있는 일이 그런 것처럼. 그럼에도 그 친구는 고마워할 것이다. 그리 말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은 '기분 좋은 생각'을 떠올리게 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