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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나 Jun 17. 2021

엄마의 온 몸을 이력서 삼아 써내려갔다.

엄마의 은퇴 준비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광고가 한편 있다.

'태어나서 가장 많이 참고 일하고 해내고 일하는데 ... 엄마라는 경력은 왜 스펙 한 줄 되지 않는 걸까?'


그때는 그저 가슴을 아련하게 울렸던 카피가 지금보니 억울하다. 이상하다. 

분명히 은행에서 계좌를 만들때도 직업란에 주부라는 선택지가 있고, 입국할 때 쓰는 세관신고서에도 주부라고 쓰는데 왜 나는 노는 사람인걸까. 차라리 노는 사람이라고 쓸걸 그랬나.

주부 안에 포함된 엄마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가슴을 메이게 하는 아련한 단어이면서도 왜 가장 무용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이제는 스펙 한 줄 되지 않는다는 말이 이렇게 억울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엄마는 대략 30년쯤 주부와 엄마로 살았다. 그런 엄마가 순식간에 중년 이혼을 결심했다.

갑자기 왜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냥요라고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갑자기는 30여년 간의 결혼생활 간 층층이 쌓인 감정의 지층을 이해하지 못 하는 말이었고, 왜라는 말에 대답을 하기엔 아빠는 대다수 형편없이 책임감 없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때때로 좋은 사람이기도 한 보통 사람이기도 했다. 

'불화'라는 단어를 꺼내는 순간 20여년의 내 인생은 불행했던 인생으로 단순화될 것 같았고, 불쌍한 사람이라는 낙인을 엄마에게 찍어주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불행과 행복으로 얼룩진 남들과 다를바 없는 삶을 살았을 뿐이었다.

실제로 엄마가 가족의 구성원이라는 타이틀이 아닌 자기 스스로를 위해 내린 첫 결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엄마가 보이지 않는 엄마라는 책임감에 짓눌려 숨죽여 살길 바라지 않았다. 결혼이든 이혼이든 모두 당사자의 행복을 위해 결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엄마의 이혼은 지극히 당신만을 행복을 위해서여야만 했다. 남들 처럼 그저 거창하지 않은 행복한 삶을 살 권리.


엄마에겐 주부를, 엄마를 은퇴할 준비가 필요했다. 이혼 후, 엄마에게 남은 집 한채, 86제곱미터의 정육면체 하나가 엄마의 은퇴 자금이었다.

엄마는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누구의 엄마나 누구의 와이프가 아닌 엄마의 이름 석자가 쓰여있는 이력서였다. 열심히 이력서를 넣던 엄마는 어느 날 한 옷 가게에 취직이 되었다. 내심 좋아하는 엄마의 얼굴을 보니 안심했다. 비록 파트타임이었지만 엄마가 처음으로 엄마 스스로를 위해 가져본 직업이었다. 

며칠 후, 집에 들어오니 일을 나가야할 시간에 엄마가 다시 집에 있었다. 

왜라고 물으니,


"아무래도 나이가 많아서 안 맞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

그렇구나라고 무덤덤한 척 대답했다.

"엑셀을 배워야 취직을 할텐데" 


엄마는 애꿎은 엑셀 실력 탓을 했다.

엄마도 나도 덤덤한 척 했지만 엄마가 세상에 당한 거절은 오히려 내게 생각보다 날카롭게 꽂혔다. 이제와 세상에 엄마의 자리는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광고의 카피처럼 세상에서 가장 많이 참고 일하고 두 아이를 번듯하게 키워낸 누구보다 강인했던 엄마가 세상에선 작고 쪼그라 들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은 생계 걱정 앞에선 공허히 울리기만 했다. 


"여태껏 놀다 갑자기 일 구하긴 어려우시겠지"

친구가 건낸 그 말이 위로인지 공감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속상하단 내 얘기를 듣고 공감해주려 했던 거겠지. 그제서야 슬픔, 안타까움으로 포장되고 있던 분노가 뚫고 올라왔다. 집에서 '놀고 있는' 내가 집에서 '놀기만' 했던 엄마에게 나를 투영시켰던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고3때 엄마는 수험생인 내 기상 시간보다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꼬박 차려 주셨다.

어떤 날은 삼겹살을 너무 좋아하던 딸을 위해 새벽 5시 반부터 삼겹살을 구우셨다. 작고 낡았지만 어느 것 하나 엄마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것은 없었다. 찌든 때 하나 없는 주방, 간혹 락스 냄새가 풍기기도 했던 욕실, 늘 냉장고를 채우고 있던 엄마의 반찬. 독서실에서 새벽 2시가 넘어 집에 들어와 던져 넣은 옷가지가 다음 날이면 언제나 세탁되어 있었다. 

엄마가 대형마트의 캐셔로 일하던 기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집에서 놀든 안 놀든 변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대다수의 시간을 놀기만 했던 엄마의 얼굴엔 주름과 검버섯이 내려앉았고, 굵어진 손의 마디 사이에 굵직하게 두드러진 혈관이 세월의 나이테를 그었다. 머리 위의 새치는 노골적으로 자라났다.

한 줄 쓸거리도 되지 못하는 주부라는 경력이 엄마의 온 몸을 이력서 삼아 30년 동안 쓰여내려갔다.


엄마에게 얼마 되지도 않는 생활비를 보태주다 지친 어느 날, '왜 준비되지도 않은 이혼을 해서는' 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이 거의 말로까지 나올 뻔 했다. 엄마에게 준비된 이혼따윈 없는 걸 알면서도 다시 엄마에게 스스로를 죽이고 살아가란 말을 할 뻔 했다. 

삼십년을 엄마의 철거머리였던 내가 이제와 엄마를 짐처럼 느끼다니 참으로 뻔뻔도 하구나. 이깟 돈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깟 돈이 힘들었다.

드라마나 영화처럼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성공하거나 모든 걸 뒤로한 채 시골에서 전원적인 삶을 사는 결말이었드면 좋겠으나, 현실은 결말 없이 흐르는 시간에 몸을 내 맡길 뿐이었다.

엄마도 나도 서로가 서로의 부분을 조금 덜어내고 스스로를 채우는 과정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엄마의 은퇴 준비는 남은 인생이 전부 걸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대단한 스펙 한 줄 만들지 못 한 인생이지만 엄마는 여전히 나의 엄마이고, 서로가 서로를 남겼으니, 이 정도면 대단한 업적같은 건 필요없는 거 아니냐고 자기 위로같은 농을 던졌다.


엄마가 된 나는 자주 내 삶을 엄마의 삶에 오버랩 시키게 된다.

그저 흐려지기만 할까 두려워 오늘도 엄마를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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