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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는 나에게 관광이 아니라 너였다

2월의 여름, 시드니 - 5.

by jcobwhy

“미안. 이번엔 진짜 안 될 것 같아.”

“여기까지 왔는데, 안 보고 간다고?”

“미안.”

“나중에 서울에서 봐. 그땐 진짜 가만 안 둔다.”


과 동기의 목소리가 서운함으로 꺾였다. 지난여름, 학기를 마치자마자 워킹홀리데이로 애들레이드에 왔다는 그 친구는 요즘 건물 청소 일을 한다고 했다. 주변엔 한인도 드물고 말도 안 통해 외롭다며, 이번에 내가 호주에 온다는 소식에 무척 기대했단다.


통화를 끊고 시계를 본다. 아직 그녀와의 약속까지 5분이 남았다. 오늘은 함께 페리를 타고 왓슨즈 베이에 가기로 했다. 시드니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나는 계속 다운타운 주변을 맴돌고 있다. 관광지라면 얼마든지 있지만, 그녀가 수업을 마치는 오후에 맞춰 함께 있으려다 보니 아침 시간은 늘 혼자다.


“왜 맨날 시내만 다녀? 볼 거 많은데.”


아침마다 전철역까지 마중 나온 이모는 슬쩍 묻는다. 하버브리지, 타롱가 주, 블루 마운틴… 나도 이름쯤은 다 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가지 않는다. 관광이 문제가 아니라, 하루라도 그녀와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다. 그게 말처럼 간단하진 않다는 것도 안다.


이모와 이모부의 눈빛에서, 나를 향한 어떤 ‘눈치’ 같은 게 느껴졌다. 결국 이모의 권유에 이번 주말 이모부와 함께 블루 마운틴에 다녀오기로 했다. 차로 두세 시간이면 된다고. 망설였지만, 더는 ‘쟤 혹시 걔 좋아하나 봐’ 같은 눈빛을 받기 싫었다.


귀찮다. 그래도 가야 한다.


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힐 무렵, 그녀가 어학원 문을 밀고 나온다. 무표정하던 내 얼굴에 그제야 기운이 돌았다.


“덥지? 커피 먼저 마실까?”

“응.”


QVB에 들러 차가운 커피부터 챙겼다. 더위에 민감한 그녀는 기온만 조금 올라가도 금세 표정이 굳는다. 아이스 모카 한 잔이면 그 찡그림이 조금은 풀린다. 늘 여름에만 만난다. 문득, 겨울이었다면 우리 관계도 조금 덜 날카로웠을까 싶다.


전철을 타고 서큘러키로 향한다. 객차 안, 나란히 앉아있는 우리.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가는 길인데도, 묘한 동행감이 감돈다. 낯선 나라, 익숙하지 않은 노선, 반대 방향으로 도는 태양—모든 게 이국적이지만, 이상하게 그녀 옆에선 그 낯섦이 덜 느껴진다.


햇살이 창문을 뚫고 들어오고, 그녀는 입술을 삐쭉 내민 채 부채질을 한다. 그 미간 주름 하나가, 내 시야의 전부다.


대합실을 나서자, 수직으로 길게 뻗은 서큘러키의 페리 승강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햇살에 번들거리는 바닥과 금속 난간, 투명한 바다 냄새가 눈과 코를 동시에 자극한다. 매표소에서 왓슨즈 베이행 티켓을 샀다. 서울에서 자란 내게, 대중교통이 바다를 건넌다는 건 여전히 낯설고도 어색하다.


시간이 되어 페리에 탑승했다. 배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미끄러지듯 항구를 벗어난다. 파도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선미를 따라 하얗게 갈라지는 물결이 브이자 형태로 길게 펼쳐진다. 마치 우리 둘을 향해 열린 여름의 괄호처럼.


“언니가 결혼기념일 파티 한대. 너도 초대했어.”

“그래? 언제?”

“이번 주말.”

“…근데 음식 하나씩 준비해 오래.”

“음식?”


잠시 머뭇거린 내 표정에 그녀가 덧붙인다.


“그런 걸 포트락 파티라고 해. 초대한 사람이 음식 다 준비하는 게 아니라, 다 같이 하나씩 가져오는 거.”


'포트락.' 어디선가 본 단어인데, 실감은 처음이다. 고작 9개월 뉴질랜드에 있었다던 그녀는 어느새 이런 문화에 익숙하다. 낯선 사람과도 영어로 웃으며 말하고, 서양식 파티 문화도 척척 설명한다. 그전의 그녀와는 다른 사람 같다. 아니, 그사이 내가 멈춰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무슨 음식 할 건데?”

“잡채가 좋을 것 같아.”


잡채? 이국에서? 믿기 어려운 선택이라 눈을 껌뻑이자 그녀가 태연히 말한다.


“채스우드에 아시안 마켓 있어. 거기 가면 웬만한 건 다 있어.”


왓슨즈 베이에 도착하자, 부두 주변으로 빼곡히 정박한 요트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하얀 돛들이 고요한 물 위에 늘어선 모습은 마치 정물화 같았다. 그녀와 함께 이 풍경을 바라보는 순간, 마음속에서 말도 안 되는 상상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이 도시에서, 그녀와 나—이렇게 느긋한 오후를 매일 보내며 산다면 어떨까. 현실은 하루하루가 눈치와 계산 속의 여행자 신세지만, 지금은 잠깐 그런 생각도 해본다.


“그런데, 날 어떻게 알고 초대하신 거야?”

“내 친구인 거 아시잖아.”

“남자친구?”

“뭐래.”


웃기지도 않은 농담이다. 스스로도 안다. 그런데도 괜히 한 번 찔러본다. 그녀는 늘 그렇듯 매끄럽게 튕겨낸다. 하지만 이 낯선 도시에서, 둘만의 작은 동행이 계속되다 보니 내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진다. 같이 걷는 길, 같이 마시는 커피, 같이 밥을 고르는 순간마다—모든 것이 커플처럼 느껴진다. 심지어 그냥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배 안 고파?”

“그냥 그래.”

“여기 음식점 있는데… 같이 안 먹을래?”


그녀는 요즘 줄곧 입맛이 없다. 더위 탓인지, 환경 탓인지 모르지만, 점심은 늘 아이스 모카 한 잔으로 때우곤 한다. 나는 갈수록 비실비실해진다. 그녀 따라다니느라 내 위장이 손해를 본다. 오늘은 도저히 안 되겠다. 강경하게 제안해 본다.


“피시 앤 칩스 맛있던데?”

“그래? 그럼 먹어볼까?”

“응.”


흰 살 생선에 두툼한 튀김옷을 입히고, 감자튀김과 함께 내주는 피시 앤 칩스. 말은 그럴싸하지만, 나에게는 어중간한 음식이다. 생선가스처럼 바삭하지도 않고, 동태 전처럼 촉촉하지도 않다. 튀김옷은 두껍고 퍽퍽하며, 소스는 새콤한 식초 맛이 강하다. 그런데도, 그녀가 좋다 하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래, 이곳에서 이걸 먹는 것—그것도 그녀와 함께라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식사다. 주문을 마치고 탄산음료를 들고 나란히 자리를 잡는다.


잡채 재료를 사기 위해 채스우드의 아시안 마켓을 들렀다. 진열대 앞에서 당면 봉지를 들고, 그녀는 장바구니에 담으며 말했다.


“고기 대신 버섯 넣으려고. 나 요즘 채식 도전 중이잖아.”


하, 이보세요. 호주가 무슨 나라야. 소고기의 나라. 나는 다시금 그녀를 낯설게 느낀다. 하루하루 곁에서 익숙해지는 만큼, 또 다른 결이 불쑥 드러난다. 그녀를 다 안다고 생각한 내가 멍청한 건가 싶기도 하고. 도무지, 알 듯 말 듯하다.


“이거 봐봐.”

“응?”

“면이랑 양념 다 들어 있어.”


인스턴트 잡채였다. 라면처럼 포장돼 있었다. 눈썹을 한껏 치켜들며 물었다.


“이래도 돼?”

“그게 뭐 어때서. 어차피 무슨 음식인지 모를 텐데.”


말은 그럴싸하다. 정성 없는 선택이라 단정 지으려다 문득 멈칫한다. 내가 면을 뽑은 것도 아니고, 간장을 담근 것도 아닌데—그럼 내가 고르려던 재료들은 대체 얼마나 ‘정성스러운가’. 정성이란 건, 결국 같이 만드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인스턴트라고 해서 마음까지 편한 건 아닌 법이다.


해가 사선으로 떨어질 즈음, 고든역에 도착했다. 내가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그녀에게 건넸다. 잡채 재료가 담긴 봉투. 그녀는 봉투를 들며 말했다.


“내일 다섯 시까지 와.”

“요리 안 도와줘도 돼?”

“응. 혼자 하는 게 편해.”

“… 요리, 할 줄은 알아?”

“나 뉴질랜드에서 9개월 넘게 살았거든요.”

“그래도 내가 더 잘할 것 같은데?”

“퍽이나.”


피식—하고 웃는 그녀가 돌아선다. 그 뒷모습을 향해 손만 흔들자니 뭔가 허전하다.


“… 조심해서 들어가.”

“왜 이래?”


망설임도, 계산도 없이—나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말로는 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까지 차올라, 결국 손이 먼저 반응했다.


그녀가 놀란 듯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나는 말없이 품을 좁혔다. 자그마한 그녀가 내 품 안에 조용히 닿는다. 남반구의 여름 저녁 공기가, 서늘한 듯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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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