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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해 Aug 13. 2021

그곳에 남자는 없었다

누군가의 신의 직장

출판 편집 디자인 회사였다. 분야가 그렇기도 하지만 그 회사에는 남자가 한 명도 없었다. 대표도 이사도 직원들도 모두 비슷한 연령대의 여자들 뿐이었다. 그게 특별해 보여서 입사를 결정했는데, 결국 그 특별함이 문제가 되었다.


가늘고 길게 사는 법

이전에도 말했지만('학력이 위조됐다' 편), 난 관련 전공자도 아니고 그 분야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소소한 경력으로? 혹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 덕에? 매번 수월하게 입사는 했다.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은 격으로 어쩌다 괜찮은 디자인이 나올 때면 상사들로부터 유난히 더 칭찬을 받았다. "이런 애도 이렇게 하는데!"라는 식의 비교로 시작되는 질타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됐으리라. 그렇게 입방아에 오르내리면 결국 혼자가 되었다. 암묵적인 따돌림이었다.

있는 듯 없는 듯 눈에 띄지 않게, 칭찬 받을 정도로 잘하지도, 욕 먹을 정도로 못하지도 말고 딱 기본! 만 해야 낄 수 있는 세계였다.


선수 입장

디자인 파트가 팀으로 나뉘며 직원 중 한 명이 팀장이 되었다. 나이? 경력? 능력? 정치? 어떤 기준으로 팀장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루아침에 팀장이 된 그 사람은 가로채기 선수였다. 프로젝트 담당자와 팀장이 함께 보고하는 시스템이었기에 다행인지 코미디인지 모든 팀원들은 팀장의 만행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여러 디자인 시안들을 쭉 펼쳐놓고, 대표(혹은 이사)가 하나를 선택하면 팀장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작업물이라고 말했다. 팀원의 눈치 따위는 살피지 않는 굳건함이 지금의 팀장을 만들어준 자양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왕비와 시녀들

직원이라고 모두가 다 같은 계급은 아니다. 각각의 부족은 왕비와 시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왕비는 쟤가 요즘 수상하다, 뒤를 밟아라! 지시를 내릴 뿐이다. 가령 A 부족의 시녀 한 명이 B 부족을 기웃대면 가차 없이 제명되었다. 그 시녀는 B 부족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그게 부족 간의 룰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메이저 부족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 여럿 모이면 그들 또한 하나의 부족이 된다. 처음에는 계급 철폐를 외쳤던 아싸 부족도 결국에는 왕비와 시녀로 나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누가 누굴 욕하고 다니는지, 누가 루머를 퍼뜨리고 다니는지 수색하는 게 시녀들의 일이었다. 부족 간의 세력 다툼과 내전으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꽃이 사라졌다

점심시간은 회사 생활의 꽃이었다. 회사가 몰려있는 곳에는 맛집도 많았다. 회사 생활을 버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런데 여자들이 많이 있는 이곳에 밥이 중요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짠 것처럼 다이어트를 했고 다이어트식 도시락을 손수 싸와서 탕비실에 모여 먹었다. 그녀들은 간장 종지만 한 작은 통에 밥을 싸와 참새 모이 먹듯 한 알씩, 한 시간을 먹었다. 다이어트도 하고, 돈도 아끼고 일석이조라 하지만 그렇게 대충 한 끼를 떼우고난 후에는 별다방으로 달려가 고열량의 음료를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어쨌든 몇 달을 편의점 도시락으로 간신히 버텼는데, 그보다 더 암울한 건 회식도 없다는 것.


회식도 회사 생활의 꽃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업무의 연장선상만은 아니었다. 이곳에서는 사실 마음 맞는 사람을 찾기도 힘들었지만 애초에 퇴근 후 회식이란 문화 자체가 없었다. 워라벨이, 사생활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분기별로 회사에서 지원해주는 돈으로 아웃백이나 빕스와 같은 곳에서 점심을 먹거나, 근무 시간 내에 단체로 영화나 연극을 보는 게 그들이 말하는 회식이었다.


팩트는 하나! 많은 사람들이 입사하고 싶어 안달 나는 회사여도, 모두가 좋다고 엄지를 척! 드는 회사여도, 신의 직장이라 불려도, 내가 싫으면! 내게 맞지 않으면! 퇴사하고 싶은, 퇴사하고 마는 회사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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