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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해 Sep 17. 2021

밥상 차리는 일

가지 않은 길, 영화판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멋진 밥상을 차려놓으면, 저는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는 거거든요."

2005년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 황정민 님의 수상소감이다. 16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기억이 나는 걸 보면 나 역시도 그의 수상에, 수상소감에 감동을 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또 몇 년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영화제작사에서 시나리오 보조작가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즉시 이력서를 냈다. 나도 어쩌면 멋진 밥상을 차리는 일원이 될 수 있겠구나! 심장이 미친 듯이 뛰다 못해 뜨거워졌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여름 한낮에 전속력으로 달리기를 하는 듯했다.


사무실은 휑한데 어수선했다. 오늘만을 위한 세트장 같달까. 마침내 회의실의 긴 테이블이 적당히 찰 정도의 인원이 모였다. 그 앞에 자리한 화이트보드에는 네 컷의 이미지와 몇 단어가 적혀있었다. 자신을 감독이라고 소개한 한 남자는 A4 용지 한 장을 모두에게 나눠주며, 네 컷의 이미지와 제시된 단어를 사용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내라고 했다. 과제를 마치는 순서대로 면접을 진행하겠다는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푹 숙이고 적어 내려 가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은 예상하고 있었던 건가? 잠깐 사이 머릿속에서 스토리를 다 만들어 놓은 건가? 신기할 정도로 하나둘 빠르게 손을 들고 면접을 보러 갔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 그대로 적고, 사이사이 단어들을 욱여넣었던 것 같다. 그리고 면접을 보는데 그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만 했다. 당시의 난 결혼은 했지만 아이는 없는, 말하자면 채용 기피대상 1호였다. 그래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데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아이는 갖지 않을 생각입니다, 주말 근무, 야근 모두 가능합니다, 남편이 아내의 꿈을 지지해줍니다,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등등...


물론 남편과 상의되지 않은 내용이었다. 아이를 기다리기도 했지만 한편 이런 시간들에 지치기도 했던 터라 일단 저지르고 봤는데 이러다 진짜 되면 어쩌지? 은근히 걱정도 됐다. 그래도 일단 GO? 책도 많이 읽어야 하고, 일 해야 할 과제도 많을 거다,  다 해낼 수 있겠냐는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기억에 남는 질문이 있다. 인생 영화가 뭐냐고. 당시 마지막으로 봤던 영화가 인터스텔라였다. 왜 하필 그 영화를 떠올렸을까. 이해도 되지 않았던 그 영화의 제목을 말하며 난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한번 더 생각해보게 만드는, 새로운 것을 알고 싶게 만드는 영화가 좋다고 말했던 것 같다.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정성껏 하냐. 감독이 말했다. 혹시 술 마시고 왔냐고. 그게 아니면 4차원이냐고. 그리고 덧붙였다.


너 마음에 든다! 합격!




⓵ 밤낮 없는 일 ⓶ 열정 페이 ⓷ 집안일 분담 ⓸ 출산 계획은 무기한 연기


합격은 했는데 앞길이 막막했다. 천천히, 하나씩 생각해봤다. 결혼 전이었다면 가능했을까? 남편 때문일까? 돈이 안되는데 꿈만 갖는 건 30대에도 불가능했다. 금수저라면 모를까. 그럼 대학 졸업예정? 뭐든 할 수 있는, 했었던 나이는 딱 그때뿐이었다. 집에 손을 벌릴 수 있는, 열정 페이에도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할 수 있는 나이는 딱 그때뿐이다. 그러니 적어도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가져야 해서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남편을, 가족들을 설득시킬 필요도 없었다. 나부터 설득이 되지 않았으니.


가보지 않았기에 아쉽지만, 가봤어도 딱히...!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미래였다. 경험이 준 촉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대로 돌아가면 가보기는 할 것 같다. 궁금하니까.


거긴 어떤 세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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