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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해 Jan 20. 2021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왕이 된 여자

신의 직장이었다. 일도 많고 야근도 잦았지만 하고 싶은 걸 모두 할 수 있었고, 하는 것마다 칭찬 일색이었다. 대량의 당근으로 늘 배가 불렀다. 수습 딱지를 뗀 지 얼마 되지 않아 A가 입사했고 그로부터 3개월 후 A는 팀장이 되었다. 팀원이라고는 나 하나였지만 유일하게 따로 방이 있을 정도로 회사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표에게 바로 전달되었던 결과물들이 팀장을 거치자 당근은 구경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매일 다시 또다시의 늪에 빠져 허우적댔다. 10개의 카피를 작성하면 팀장은 그중 한 개를 고르거나, 다시! 를 외쳤다.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팀장이 알아서 고치거나 새로 만들어 냈다. 팀장이 자리를 비운 어느 날, 예전처럼 대표에게 바로 전달된 결과물에 대표와 나는 비로소 웃음을 되찾았다. 이후로 에 있어서 만큼은 팀장을 거치지 않게 되었다. 그날 하필 팀장이 자리를 비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내 사람 만들기


이후 팀장은 출근과 동시에 트레이닝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절대 자리를 비우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에 회사 사람 모두가 놀랐다. 커뮤니케이션도 모두 메신저로만 했는데 어느 순간 이 팀장, 저 대리랑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회사의 인싸가 되어 있었다. 술자리 한 번 없이, 오직 메신저로만! 그리고 나와 같이 매일 밥을 먹고 술을 먹던 사람들까지도 모두 A의 사람이 되었다. 사람 참 좋다고. 그리고 꼭 덧붙였다. 팀장한테 잘하라고, 팀장 대우 좀 해주라고. 권한 뺏지 말라고.


너네는 A 팀장을 잘 몰라요. 그 사람이요.  


밖에서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둘만의 공간이었다. 팀장은 이 세 가지는 꼭 지키라고 했다.


1. 출근하면 제일 먼저 (팀장) 쓰레기통을 비울 것

2. (팀장) 책상 위를 닦을 것

3. (팀장이) 출근하면 물어보지 말고 커피를 바로 가져올 것


이건 기본 중에 기본이라고 했다. 점심도 꼭 둘이 같이 먹어야 했는데 메뉴는 팀장이 결정한 것으로, 수저와 젓가락은 휴지 위에 가지런히, 물컵은 수시로 가득 채워야 했다. 어쩌다 끼게 된 임원 회식에서도 위의 내용들을 웃으며 이야기할 정도로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다 나이 얘기가 나왔고 빠른 년생이었던 A 팀장은 사회에서는 '학번'이 중요한 것 아니냐며 나보다 한참 '위'라는 것을 강조했다. 고작 두 살 차이였는데.



해방의 기쁨


만세, 만세, 만세! 우리의 독립 공간은 회의실로 원상 복귀되었다. 누구나 듣고 볼 수 있는, 너도 나도 같이 있는 트인 공간으로 이동했다. 더불어 A 팀장의 기세도 한 풀 꺾였다. 그게 빼앗긴 들 때문인지, B 팀장과의 교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숨통은 트였다.


그리고 아주 잠깐 평화로웠다. A 팀장은 결혼 준비로 바빴고 또래 직원들은 다시 술로 하나되어 으쌰으쌰했다. 그 사이 회사는 C 상무를 새로 영입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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