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처지에 놓인다면, 더 잘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하세요?
오랫동안 논란이 분분했던 연예인 J 씨와 특수 교사 간 소송에서 최근 특수 교사의 무죄로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이 과정을 지켜본 많은 이들이 관련 기사에 남긴 댓글들. 양측의 처지와 입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거나 단편적인 내용만 아는 사람들이 걸러지지 않은 감정과 생각들을 마구 쏟아내는 태도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다. 오히려 재판 결과는 이 사건의 핵심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언론사에서 댓글 창을 열어놓고 방치하는 것조차 폭력에 대한 방관자적 자세로 느껴졌다.
그들은 자신이 눈을 가리고, 귀를 틀어막고 마구 칼을 휘둘러대고 있는 걸 알까? 연예인 J를 향한 비호감 정서를 마구잡이로 엉뚱한 방향으로 쏟아낸 사람도 있고, 아직 한국 사회에 곰팡이처럼 군데군데 피어 채 닦아지지 않은 발달장애 혐오 정서를 드러낸 사람도 있다. 장애 아동을 돌보는 사람이 얼마나 힘든지를 강조하는 비장애인 중심의 사고를 보인 사람, 녹음 외의 방법으로 학대를 증명할 길이 없는 약자의 입장을 호소하는 사람… 각자의 세계에서 그들의 말은 모두 옳다. 하지만 더 많이 보고 듣게 된다면? 그래도 자신이 휘두르는 언어의 칼부림이 합당하다고 여길까? 고소로 드러난 갈등 이면에는 여러 문제 요인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단순히 한 사람의 인성을 탓하며 손가락질하기에는 훨씬 복잡한 맥락이 감춰져 있음을.
우선 신경다양성 범주에 속하는 발달장애 군은 지체 장애와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지체 장애는 명확히 드러나는 불편함에 대해 보완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지원이 필요하다고 요약할 수 있다면, 발달장애, 또는 장애 진단을 받지 않은 신경다양성에 속한 이들(경계선 지능, 학습장애, 기능이 높은 자폐 스펙트럼, 복합적이지만 증상이 비교적 가벼운 경우 등)에게는 꾸준한 이해와 교육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세계는 겉으로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많기에. 불편함을 악함으로 오해하기 쉽기에. 결정적으로, 이들의 불편함은 주변의 이해와 맞춤형 교육을 통해 완화될 가능성을 갖기에.
얼핏 장애는 영구적이니 안 될 거라는 편견을 가질 수 있다. 물론 신경다양성의 특징은 평생에 걸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일정 부분 한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을 이해하고 사회와 공존하게 하려는 다양한 연구와 시도가 이뤄져 왔고, 점차 발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서 이미 이뤄진 연구 결과들을 비교적 최근에 도입하여 복지관이나 병원, 사설 센터를 통해 지원하고 있다.
나는 치료 서비스의 이용자와 제공자 입장에 모두 서봤지만, 발달장애의 어려움은 비장애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 속에서 치료실만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다. 발달 초기에는 치료실과 가정에서 맡는 역할이 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장애 당사자가 속한 사회가 어떤 곳인지가 더 중요해진다. 그에게 필요한 지원과 교육적 요구를 이해하고 협조할 수 있는 곳인지 아닌지는 장애 예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금 학교에서 J 씨 자녀와 같은 아이들이 받는 지원은 아직 제한적이고 유연성이 부족하다. 장애의 특성과 중증도를 고려하지 않은 교사 대 학생 비율, 특정 교과목에만 도움반에 가서 공부하는 시스템, 종합적으로 설계되기도, 지원받기도 힘든 개별화 교육계획. 비장애 중심의 입시 위주 교육 현장에서 특수 교사는 장애 학생의 문제 행동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특수 교사도 학교 안에서는 소수의 입장이다. 심적인 압박을 많이 받는 위치. 그런 상황에서 교육적 소신대로 차분히 아이를 관찰하고 중재 계획을 세우기란 외로운 사투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특수학교는 턱없이 부족하고, 경계선 급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학력을 인정받는 학교도 있지만, 교육청의 지원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다.
훈이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오기 전, 통합학급을 운영하는 단설유치원에 대기 신청을 하여 오후 1시 30분경에 마치는 교육 과정 반에 입학할 수 있었다. 빨리 마치는 편이었지만 그 유치원이 나에겐 신의 한 수였다. 처음 입학했을 때 특수 교사 선생님께서 보낸 메시지를 잊을 수 없다.
‘어머니, 이렇게 예쁜 아이 맡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디를 가나 훈의 남다른 특성 때문에 걱정 어린 눈초리를 받곤 했다. 통합을 지향하지 않는 사설 기관은 경제적 논리에 맞지 않으므로 입학할 수 없었다. 어린이집 인증 평가하는 날 등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은 적도 있다.
맞아, 우리 아이 그렇게나 예쁜 아이였는데. 남들하고 똑같이 밤잠 설치며 안아주고 키운 아이였는데. 잘 웃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는데. 뽀얗고 잘 생겼다고 스쳐 가던 누구나 미소 짓던, 그런 아이였는데…. 삶의 보물이던 아이가 문제 덩어리가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네가 문제인지, 네가 발 디디는 세상이 문제인지 따져볼 겨를도 없었던 시간.
아이가 통합반에 있는 시간 동안 특수 교사나 실무사가 옆에서 관찰하며 필요한 도움을 제공했고, 분리된 교실에서 맞춤형 교육도 이뤄졌다. 역통합 수업이라고, 통합반의 비장애 친구들이 도움반 교실에 와서 함께 다양한 활동을 하기도 했다. 화채 만들기, 여러 가지 악기로 연주하기 등. 그런데 초등학교에 와서 그런 역통합 수업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도움반은 특수교육대상자만 오가는 공간이라는 사실이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드는 것 같아서…
중학생이 되니 ‘친한 친구’라고 하여 비장애 학생이 장애 학생의 도우미 역할을 하면 교내 봉사 활동으로 인정되는 제도가 있었다. 교실에서 왕따나 괴롭힘이 있는지 살피는 역할도 하고, 장애 학생의 돌발 행동이나 변화에 대해 관찰하기도 한다. 같이 맛있는 것도 먹고, 놀이 공원에도 간다. 일명 ‘친친’ 활동을 하는 아이들은 개별화 학습실을 자유롭게 드나든다. 특별한 용무가 없어도 쉬는 시간에 아이들과 와서 놀다 가기도 하는 모습을 보았다. 좋은 현상이다. 한편으로는, 이 또한 봉사 점수를 취득하는 제도로 장애 학생이 ‘봉사의 대상’이라는 위치에 놓인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한계점도 있다고 보인다.
대한민국에서 통합 교육, 특수 교육은 아직 제도적으로 많이 보완되어야 하고 여러 도전이 필요하다. 다행스러운 건 발달장애인 부모들의 끝없는 헌신과 노력이 많은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왔고, 시대의 애로 사항을 묵묵히 감내하며 현장에서 꽃을 피워내는 교사들이 여전히 곳곳에 있다는 점이다.
아이의 심상치 않은 변화에 ‘몰래 녹음’이라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부모, 부모가 들으면 억장이 무너질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던 교사, 각각의 입장에 다 숨겨진 맥락이 존재할 것이다. 교사도 현장의 부조리와 부모의 태도가 벅찰 수 있고, 절박한 부모 쪽에선 교사와 마음이 일치하지 않아 답답할 수 있다. 현상보다 처지를 봐야 함께 나갈 수 있다고 본다. 더 많이 소통하고, 더 많이 서로 이해하고 격려해야만 한다. 그래야 딱딱한 네모 같은 사회에서 배회하는 아이도 조금이나마 더 등을 기대고 버틸 수 있다. 먼 미래에 당당하게 자신의 가능성을 펼쳐 보이는 아이의 모습이 현실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맥락 밖에서, 알지 못하는 세상에 대해 언어의 칼을 마구 휘두르는 댓글 부대여, 일상의 스트레스를 평소 혐오하던 누군가에 대한 비난으로 풀려는 자들이여, 제발! 그 입 다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