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도하 - 미래의 손(봄날의 책, 2024)
20대 중반 앳된 나이에 세상을 떠난 시인의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 ‘미래의 손’은 시인의 친구들이 합심하여 내준 시집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마치 죽음을 예고하듯 죽음을 이야기하는 시가 많다.
시인이 말한다. 사랑이지만 사랑이 아니고, 시인이지만 시인이 아니라고. 사랑을 사랑이 아니게 하고, 끝내 시인이라고 불리기를 거부하게 하는, 낱말 너머의 세계가 궁금했다. 시인이 되지 못하는 시는 왜 써야 하는 걸까, 질문을 던져본다. 죽음을 일상의 사물처럼 읊조리는 시인의 마음 안에 깊이 걸어 들어가고 싶었다.
나는
천국에 갈 것이고 이 시도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다.
많이 쓸 것이다.
오늘의 구름은 양떼구름
외국에서는 물고기의 비늘이라고 부른다.
그래, 천국에서는 하늘과 초원과 바다가 섞여 있지만
그래도 양과 물고기는 있다.
양몰이 개와 그물은 없다.
―「입국 심사」 부분
영원히 간직할만한 가치가 없는 시지만 많이 쓰겠다고 한다. 모든 걸 버리고 가는 천국에서는 시도 버릴 것이라고. 작가라면 자기 작품이 자식처럼 귀하기 마련인데 시인은 시가 쓰이는 순간에도 후에 가차 없이 버릴 수 있다고 담담히 말한다. 창작의 고통을 이겨내고 쓴 내 보물 같은 시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자연도 자신을 주장하지 않고 뒤섞여버리는 시인의 천국에서 생명은 자유롭게 노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양몰이 개와 그물 같은, 통제의 방식이 없다.
세상의 디테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고양이 수염이나 베갯잇이나 매트리스의 올록볼록한 부분
창의 격자무늬를 통과해 들어오는 빛의 그물
누가 나를 망설이며 안아줄 때
나는 성냥개비를 낳았다
지구를 불태우기엔 부족한 개수였고
내 집을 불태우기엔 충분한 개수였다
덜덜 떨며 서로를 안고 있는 성냥개비들
그럼 더 큰 불이 날 줄도 모르고
고통을 나눠 가지려고 하면
더 큰 고통이 된다고
내가 낳은 성냥개비들에게 말해줄 순 없었다
네가 나를 선택하지 않았듯이
나도 너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어……
엄마가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무리 지어 걸어가는 여자들을 보았다
더 큰 불
나는 지구 규모의 화재를 상상하고
다른 모양으로 가물다가
결국엔 같은 재로 스러질
나무와 무리와 내가 마음에 든다고
말해야만 했다
침대에 바르게 누워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집과 정원이
불타고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만 했다
―「선택」 전문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집과 정원. 시인은 그저 절대적 중심을 거부하고 다양성을 추구하려는 태도를 가진 것뿐일까? 그렇게 치부하기엔 집과 정원이 손을 뻗어 닿을 듯 간절하다. 시인은 오히려 생생하게 경험해보지 못했던 자신만의 중심을 그리움으로 남겨 시를 써왔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집과 정원이 될 수 없었던 무수한 세계들 속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해 답답했던 심정이 시가 되어 헤엄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지. 작품들 속의 표현을 토대로 아버지의 가정 폭력, 어머니의 무심한 말투 때문이라는 진부한 추측은 하고 싶지 않다. 소수자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 때문이라는 말도.
성냥개비를 낳을 수밖에 없었던, 보지 못한 소망이 불타는 것을 반듯하게 누워서 느껴야만 했던 사람. 내가 그의 시에서 느낀 마음은, 무기력, 슬픔, 좌절……혹은 무엇이 홍수처럼 차오르는 시간을 비워내려는 절실한 나비의 파닥임이다.
중학생이었던 화자가 잡은 미래의 손, 시인이지만 시인이 될 수 없었던 그 손에 씨앗 가득한 민들레 줄기 하나 쥐여 주었다면 좋았을걸. 지금 시인은 자신이 그리던 천국에서 양과 물고기처럼 노닐고 있을까?
주머니 속에서 어떤 손을 잡았다.
그것은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선생도 신도 아닌
시를 쓰게 될 중학생의, 미래의 손.
하지만 지금 이 시에는 시인이 등장하지 않고
주머니 속에 깊게 손을 찔러 넣은 중학생이 당신을 지나치고 있을 뿐이다.
―「미래의 손」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