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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해산책방

59개 부사와 함께하는 색다른 여행

소위(김하진)-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채륜서, 2025)

by 해산

한국어의 아홉 가지 품사 중에서 부사는 특히 폭넓게 다른 단어를 꾸며주는 역할을 한다. 관형사는 명사, 대명사만 꾸며주지만, 부사는 동사, 형용사, 관형사, 명사 혹은 문장 전체를 꾸며주기도 한다. 시를 쓸 때 형용사, 부사를 되도록 쓰지 말라고 하는 건 꾸며주는 말로 인해 독자로선 의미의 해석이 제한될 수 있기에 신중하기를 당부하는 것일 터.

소위 작가의 「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에서 부사는 조연 아닌 주연으로 등장한다. 각각의 부사가 말에 덧입히는 색을 붓에 깊이 눌러 찍은 후 물통에 흔들어 풀어내듯 글에 잔잔히 풀어내었다. 삶의 어느 순간에 더욱 진해졌던 부사들의 의미. 글 전체에 고루 녹아든 부사의 색은 내 삶의 어떤 빛깔과도 닮아 있었다. ‘대체로’에서 시작해 ‘마침내’에 이르기까지, 부사들의 행렬은 참된 자아를 찾아가는 긴 여정과도 같았다.


삶의 이면엔 수많은 부사가 숨어 있습니다. 부사 하나가 하루를, 한 달을, 혹은 일 년을 지배하기도 하지요.


책을 여는 작가의 말처럼, 손에 쉬이 잡히는 익숙한 말과 행동을 몸에 덧바르며 하루하루 살아가다가도, 문득 부사 하나가 작은 가시처럼 겹겹이 쌓인 시간의 층을 파고들어 콕콕 찔러대곤 하는 게 우리 인생이다. 몸에 박힌 작은 가시라고 무시하고 방치하면 상처는 더 곪아 깊어진다. 조심스레 가시를 빼기 위해 들여다보지 않던 몸을 가만히 살피는 눈처럼 작가는 삶을 쓰다듬는다. 59개의 가시, 부사들의 정거장을 거쳐 내린 마지막 역에는 잘 닦인 거울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바로 부사를 통해 더 선명해진 나. 작가의 여정에 함께 아파하고 미소 띠며 동행하다 보니 ‘마침내’ 모든 부사의 색이 빛처럼 섞이며 나를 투명하게 바라보는 거울이 되었다. 그래, 결국 나. 그리고 우리. 그리고 세상. 모든 색이 어우러진 빛, 그건 사랑이다.

소위 작가의 책에서 발견한 선물은, 모든 가시와 아픔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나만의 사랑으로 향하는 여행길이다.



사슬에 묶인 채 걸어도


대체로 좋은 조건과 환경을 부여받아 살았지. 그래서인지

작은 티끌이 너무 커 보이기도 했고,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는

결코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명이 굵은 사슬 같았지.

제발, 내가 원하는 대로 제발. 억지로 붙들수록

사슬은 더욱 옥죄어왔어.


언젠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기약 없는 물음에 설령 사슬을 끊지 못한다고 해도

자유는 그림자처럼 나와 함께 있다고, 감히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고 답해 보았어.

아무튼 오늘의 몸짓에 자유도 따라 움직이며

어차피 끊을 수 없는 사슬이라면 없는 것처럼 꿈틀대기로 해.

만약 녹이 슬어 절로 끊어지는 날이면

눈에서 하염없이 세월이 흘러내리겠지.

그때까지 그럭저럭 살아보는 게 어때?


스물의 열정과 포부는 사라졌다 해도

하필 이런 일이, 이런 사람이,라는 말은 아껴두기로 해.

사슬이 영원히 옥죌 것이란 절망이 자꾸 들기도 하겠지만

이제 거의 다 왔어.

하마터면 사슬에 묶인 채 몸부림치다 탈진해서 죽을 뻔했지 뭐야.

무턱대고 걷는 걸음이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문을 열기도 하잖아.

일단 걸어. 움직여.

바로 지금, 유난히 마음이 향하는 곳, 거기 너의 사슬을 풀 열쇠가 있을지도 몰라.

이토록 멋진 너잖아.





59개 부사 모두 넣고 싶었는데 24개에서 끝내기로 합니다!

소위 작가님, 59개의 부사를 풀어내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대한민국이 부사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그날까지!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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