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을 우리의 ‘gloom’에 대처하는 자세
‘depression’ 혹은 'melancholy'. 우울한 기분을 뜻하는 두 용어는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미묘한 의미 차이 정도). 질병으로서의 우울, 우울 장애 진단에서는 ‘depressive disorder’로 표기한다. 그에 비해 ‘gloom’은 광범위한 침울의 의미를 담고 있다. ‘밝음’의 반대 개념으로 물리적 어둠을 뜻하기도 한다.
‘Gloomy relay’는 '우울'을 테마로 삼은, 브런치 작가 18인의 각양각색 에세이 모음집이다. 어린 시절 외상 사건, 침울했던 가족 분위기, 이루지 못하고 내내 가슴 한편에 굳은살로 박힌 꿈 하나, 가라앉는 기분을 떠오르게 하는 비결, ‘우울’로 뭉뚱그려진 감정의 포장을 벗겨 하나씩 서로 떼어 이름을 불러주는 마음의 대화…. 제목처럼 폭넓은 ‘gloom’의 장면과 표정, 서사, 대처법 등을 저마다의 개성 있는 문체로 담아내었다. 디자인도 과감하다.
DSM(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의 진단 기준에서도 우울증의 종류는 다양하다. 가장 심각한 주요 우울 장애, 기분 저하증, 월경 전 불쾌감 장애, 파괴적 기분 조절 부전 장애. 우울은 이토록 모양도, 색도, 깊이도, 길이도 다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오는 손님과도 같은 감정이라는 것이다. 썩 반갑지는 않지만, 억지로 내쫓는다고 나가지도 않는 손님. 차 한잔 나누는 마음으로 가만히 살펴보면 미처 몰랐던 내 얼굴을 보게 되는 손님. 우울감이 일상에서 수시로 드나드는 손님이어서 잘 대접해 보내는 습관이 들어 있다면 이보다 유익할 수 있을까? 하지만 손님이 아닌 주인이 되고, 그 앞에 쩔쩔매며 어느새 마음의 자리를 온통 빼앗겨버린다면 그보다 불행할 수 있을까?
‘한낮의 우울(앤드루 솔로몬)’은 우울증과 관련한 백과사전 같은 책이다. 저자는 인생의 상당 기간에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으며, 결국에는 질병이 아닌 더불어 살아가는 자신의 성격 일부처럼 받아들였다. 중증 우울증 환자에게 ‘가만히 있어서 그래. 몸을 움직이고 바쁘게 살아봐.’라는 조언은, 흡사 다리를 다친 사람에게 빨리 뛰라고 재촉하는 것과 같다. 똑같은 상황에서 누군가는 기분을 조절하며 평소의 기능을 유지하는 데 반해, 다른 누군가는 낙담에 빠져 거의 아무 일도 못 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낙담한 이에게 ‘저 사람 좀 봐! 너도 배워.’라고 하는 건 사람에 따라 기질적 취약성이 다름을 이해하지 못한 단순한 조언이다. 약물 치료가 필요한 우울증도 있지만, 우리가 일상의 흐름을 잘 타는 편이라면 ‘우울’이라는 손님을 맞는 여러 가지 방법을 구사할 수 있다.
‘Gloomy relay’ 뒤편에 예쁘게 적힌 ‘창조의 오렌지컵 정신’은 우울 너머 창조로 나아가는 비법을 독자에게 친절히 전수한다.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라.
어린 시절에 좋아했던 놀이를 떠올려라.
자연을 가까이하고 어린이를 존중하라.
쪼그라들지 말고 쪼대로 하라.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라.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나라는 것을 잊지 마라.
고통을 겪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그로부터 자신감을 얻어라.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기적을 발견하라.
자신의 재능과 아름다움을 굳게 믿어라.
먼저 되고 싶은 것이 된 척하고 나서 진짜가 되기 위해 노력하라.
미워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모든 에너지를 성장에 투여하라.
지금, 여기를 나만의 플레이 그라운드로 만들어라.
우리의 인생이 예술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
<브런치 작가 18인, 『글루미 릴레이』, 마니피캇, 2025.>
찬찬히 곱씹다 보면 나의 출발선이 어디인지 어슴푸레 윤곽이 그려진다. 출발 총성처럼, 특히 마음에 닿는 문장이 있을 것이다.
책에서 진아 작가가 언급한 유머는 고통과 우울감에 대처하는 고차원의, 성숙한 대응이다. 긍정적 방어기제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우울증에 무릎을 꿇고, 어떤 이들은 그것과 맞서 싸운다. 우울증은 심각하게 의욕을 저하시키기 때문에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꿋꿋이 견디려면 상당한 생존 욕구가 필요하다. 뭐니 뭐니 해도 유머 감각이 회복의 가장 강력한 척도이며, 그것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가장 강력한 척도이기도 하다.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다면 희망이 있는 것이다.
<앤드루 솔로몬 저, 민승남 역, 『한낮의 우울』, 민음사, 2022. p708.>
지금 나의 우울 씨는 건강의 상실이라는 여건을 틈타 내 마음에 입국하여 장시간 체류 중이다. 글 쓰느라 긴장하는 시간이 허리와 등을 굳게 하고 통증을 악화시킨다는, 결과에 대한 경험적 예상은 이전에 얻던 보상보다 강렬한 것이었다. 목표를 타협하고, 시간표를 조율하고, 생활 습관을 새롭게 쌓아가는 시간이 필요했다. 건강의 상실과 더불어 의지까지 놓아버리면 우울 씨는 기필코 주인 행세를 할 것이기에, 완벽의 기준을 낮추고 우선순위를 정해 목표의 단계를 세분화하며 의지의 손을 놓지 않아야 한다. 언젠가부터 난 헤어졌다가도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손님으로 우울 씨를 인정하고 있다. 너무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깨달았다. 세상에! 주인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어! 아니었던 거야!! 손님으로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자유의 파도가 밀려드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다음 글에서 나의 ‘Gloomy relay’를 풀어낼 예정이다.
참! ‘창조의 오렌지컵 정신’을 보고 질문이 하나 생겼다. ‘쪼대로 하라’는 건 어떻게 하라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