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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지 못한 눈밭에서

by 해산

걷지 못한 눈밭에서

해산



파가 일주일째 베란다에 드러누워 있었다

고향을 떠난 자리에서 한 자락 빛에 기대어


시는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비슷한 걸 찾아야 한댔어

파와 사람과 냉동실과 인공지능


시인은

빛을 닮아 바스락 늙어가는 파와 사람을 나란히 놓아두고 냉동실의 파는 로봇으로 둔갑시키고 싶어져서

하얀 눈밭에

다리 끝이 노란 파와 미소 짓는 노인과 잘린 파 조각들과 냉장고 한 대

흩어놓고

파의 미학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그들은 눈을 툭툭 차며 곤란한 듯이 자리를 지키고

눈밭에 따갑게 내리쬐는 시인의 시선만이

그림자를 따라 흔들렸다


기능이 향상된 냉동 파라고 말하는 시인에게

파 조각 하나가 입을 삐죽거린다

기능이 향상되어 봤자 파가 파지


맞아, 그래봤자 파지!

시인이 시선을 거두고 웃는다

모두 어린애처럼 웃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도 함께 걷지는 못했지만……


점점 커지는 웃음소리는 눈덩이가 되어 날아다니고

눈밭에 흐드러지게 쌓였다

걷지 못한 웃음이 누워 놀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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