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저희가 보는 건 딱 한 가지, 믿음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은 불허한다는 걸 자식들 어릴 때부터 가르쳤어요. 그래도 아들이 좋아하고, 저희 교회 목사님이 기도 중에 산이에게 여자친구가 생긴 것 같다고 알려주시고 나중엔 저에게도 기도중에 환상으로 보이길래 받아들였습니다. 저희가 얼마나 큰 결단을 내린 지는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자존심이 센 아빠가 대답했다.
"교회 다니는 걸 어째서 더 우월한 것처럼 말씀하십니까."
아빠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단했다.
"그렇게 믿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으면 교회에서 자매를 찾으시지... 자꾸 저희 아이를 억지로 받아들이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이 결혼을 밀어붙이는 건 그쪽입니다. 저희는 공부 다 마치고 자리 잡고 하는 게 맞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결혼할 당사자는 나인데, 난 이 결혼을 꼭 하고 싶은데 상견례 자리에서부터 불편해지면 앞으로 미움받을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적어도 이런 자리에서는 아빠가 굽히고 들어갔으면 싶었다.
그는 양가 부모님의 눈치를 보느라 절절매기 시작했고, 나는 손으로 테이블 아래에서 엄마의 허벅지를 툭툭 치며 아빠를 멈추게 해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다행히 그의 아버지가 정리를 하셨다.
이번 주에 혼인 신고 마치고 배우자 비자 신청
나는 런던으로 먼저 출국
그는 비자 나오면 바로 런던으로 출국
12월 말에 그의 아버지가 교수로 재직 중인 대학교 동문회관에서 결혼식
예물·예단 생략
양가에서 생각하고 있는 결혼 자금은 나중에 집을 사거나 아이가 생기면 도와주기
상견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아빠와 엄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엄마와 별거 중이었던 아빠는 따로 살고 계셨는데, 우리를 내려주고는 한마디를 더 했다.
"내가 너 학비랑 다 대줄 테니까. 너 그냥 공부하면 좋겠어."
아빠의 목소리가 떨렸다.
"공부 끝나고 결혼해도 되는 걸 뭐 하러 복잡하게 이러고 있어. 그놈 자식이 영국에 체류할 방법을 왜 결혼으로 해결하려고 해."
그 말이 가슴을 찔렀다.
"시어머니 될 사람 보니 마음고생 엄청 시킬 것 같은데... 너 지금 그 자식 없으면 죽을 것 같아도 더 좋은 사람 많아. 혼인신고 하고 나면 너 인생의 모든 결정은 그때부터 다 너한테 달려있다는 거 명심해."
아빠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해. 아빠 그리고 엄마... 그런데 헤어질 수 있는 사이가 아니야 우린..'
이틀 뒤, 혼인신고를 마쳤다.
법적으로 기혼자가 되었으나 결혼식을 하지 않아서인지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줄 것이 있다며 집으로 호출하셨다.
집으로 가니 내 이름이 새겨진 성경을 주셨다.
"매일 읽다 보면 지혜와 명철을 얻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될 거다."
"네... 감사합니다."
출국 전 마지막 날, 엄마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으나, 남편의 교회 예배에 참석해서 교인들에게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했다.
주보에는 우리 부부의 혼인 신고와 12월에 예정된 결혼식이 새 소식으로 나와 있었다.
예배를 마치고 서 있으니 여러 사람이 와서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중에 몸이 조금 불편하신 중년의 여성분과 그분의 예쁘장하게 생긴 딸이 목례를 하고 지나갔다.
시어머니가 속삭였다.
"저 자매가 시집오려고 엄청난 노력을 했었어. 딸 있는 집들은 다들 산이를 얼마나 욕심냈는지 몰라. 너는 복 받은 줄 알아."
어떻게 반응해야 되는지 몰라 남편을 쳐다봤다.
"홀어머니에 파킨슨병도 앓고 있고, 어린이집 선생이라 절대 안 된다고 했던 사람이잖아."
남편의 말에 시어머니는 그런 말 한 적 없다며 버럭 화를 냈지만 이미 얼굴과 귀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한국에서 정신없는 2주간의 시간을 보내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늘 함께였던 남편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새로 입학하게 된 학교생활에 조금 정신없기도 했고, 회사 업무도 밀려있어 주말에도 책상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데 시아버지에게 이메일이 왔다.
매주 가정예배를 드리는데 영국에 있어 함께하지 못하니, 성경을 읽고 묵상을 통해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기록하여 일주일에 한 번씩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숙제가 하나 더 늘었다.
그렇게 하겠다고 답장을 드렸다.
너무 길게 느껴졌던 약 3주간의 시간이 흐르고 남편이 돌아왔다.
"이제 가장으로서 책임을 무겁게 느끼게 돼."
그는 부모님과 교회에 매주 출석하기로 약속했다며 런던에서 다닐 만한 교회를 찾아봐야 한다고 했다.
"대신 너에게는 충분한 시간을 줄게. 절대 교회를 강요하지는 않을 거야."
시아버지가 주신 숙제를 해야 하는데 성경의 고어체가 낯설어 잘 읽히지 않는다고 하자, 남편은 영어 성경책을 사주었다.
다행히 영문 성경책의 표현은 한글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직설적이라 이해가 쉬웠다.
"우선 모세 5경을 소설책 보듯 읽고, 신약을 읽어봐."
그는 내가 느끼지 못하는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이해가 될 거라고 했다.
"만약 고민이 있거나 마음이 힘들 땐 잠언을 읽으면 돼. 우리 모두가 아는 솔로몬이 대부분 작성한 거야."
내 안에 신앙심이 생기지는 않았으나, 신약을 읽으면서 저 시대에도 차별받는 사람들과 약자를 옹호하고 소외된 사람들도 인격적으로 대하고 사랑으로 감쌌다는 예수님의 존재가 흥미로웠다.
"오빠, 신약 읽어보면서 느낀 건데..."
나는 말을 이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10분의 1만 닮아도 기독교가 전 세계인들의 종교가 되었을 것 같아."
내 말에 그가 나를 쳐다봤다.
"교회에서 정치질하고, 헌금 액수로 차별하고, 사회적인 기준으로 판단하는 걸 많이 봐왔는데... 성경은 교회의 공동체 역할과 성도의 본질에 대해 정확히 얘기하고 있잖아. 왜 믿음하고 실제 삶 하고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까?"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인간이 약한 존재이기 때문이야. 그래서 끊임없이 회개하고 기도하며 살아야 하는 거고."
나는 나만의 속도로 기독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남편은 그런 나를 기다려주었다.
그는 돌아온 후 얼마 안 되어 런던 외곽에 있는 한국 대기업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거리상 25마일 정도 떨어진 곳이었는데, 고속도로가 출퇴근 시간에는 꽉 막혀 왕복 4시간 이상 걸리는 날도 허다했다.
매일 아침 6시 30분이면 출근하는 그를 배웅했다.
정장바지에 셔츠를 갖춰 입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콩닥콩닥 설렜다.
퇴근 시간은 5시였지만 막상 집에 오면 7시가 넘는 날이 많았기 때문에 평일 저녁은 내가 항상 준비하게 되었다.
요리책을 보며 오늘은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고 그를 위한 요리를 하는 게 즐겁고 재밌었다.
서투른 요리에도 그는 항상 맛있게 먹어주었고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오빠, 우리 평생 이렇게 연애하면서 살자."
"우린 그럴 거야. 남들처럼 권태기니 뭐니 이런 것도 없을 것 같아. 그렇지?"
매일 밤 따뜻한 그의 품에 안겨 잠들기 전 작은 수다를 떠는 시간이 참 좋았다.
11월 말, 결혼식을 한 달 정도 앞둔 어느 날.
담임 목사님의 아들이자 부목사님이 런던에 4박 5일 머물 예정이라 했다.
시어머니는 다른 건 몰라도 런던에 체류하는 동안 우리 집에서 꼭 저녁을 대접하라고 하셨다.
부목사님이 한국으로 돌아가서 우리 부부에게 잘 대접받았다는 걸 담임 목사님께 전달하면, 곧 권사 선거를 앞두고 있는 당신의 위상이 오를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남편은 부목사이지만 자신과는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형 같은 존재이니 너무 부담 가질 필요는 없다고 했다.
부목사가 런던에 도착한 첫날, 히드로 공항으로 가서 켄싱턴에 있는 호텔까지 데려다주었다.
둘째 날은 남편이 휴가를 내고 런던 투어를 시켜주고 우리 집에서 저녁을 함께 했다.
셋째 날은 나도 수업이 있고 남편도 출근해야 해서 부목사는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 7시까지 우리 집으로 오기로 했다.
난 집에 평소보다 더 일찍 돌아와 정신없이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데, 부목사가 약속 시간보다 이른 6시 40분 즈음 도착했다.
남편은 M25가 꽉 막혀서 한 시간 넘게 꼼짝 못 하고 있다가 이제 속도가 난다며, 7시 15분은 넘어야 도착할 것 같으니 먼저 저녁을 먹고 있으라고 했다.
식탁에 마주 앉아 어색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좀 친해졌으니까 제수씨라고 해도 되죠? 산이는 동생이나 마찬가지라서..."
"네, 그럼요. 편하게 불러주세요."
"제수씨, 마스크가 제 스타일이에요."
... 뭐래.
얼굴이나 생김새도 아니고 뭔 마스크.
"아... 네..."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거 아세요? 산이 교회에서 인기 엄청 많았어요."
"그랬을 것 같아요."
"산이한테 첫눈에 반했어요?"
"그런 것 같아요."
"산이 말로는 제수씨한테 보자마자 반해서 바로 들이댔다던데..."
부목사라는 사람의 표현이 저급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남편은 그런 표현을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을 알고 있었다.
"네... 뭐..."
"산이 군대에 있을 때, 교회에 두 살 많은 누나가 산이 좋아해서 자살 시도한 적이 있었어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그는 말을 이어갔다.
"죽지는 않았고, 아직도 우리 교회 다녀요. 지난번 인사도 하는 것 같던데?"
듣고 싶지 않았다.
"제가 꼭 알아야 되거나 저희 결혼에 도움이 되는 내용인가요?"
나의 물음에 당황할 줄 알았는데 표정 변화 없이 말을 이어간다.
"당연히 알아야죠. 결혼식 앞두고 있는데 숨기는 게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게... 제가 이 사실을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을 텐데 굳이 알고 싶지 않아요. 더군다나 당사자도 없는데..."
"임신을 했었거든요. 그 누나가... 그러고 보면 장로님도 참 대단하신 분이에요... 임신한 자매를.."
그가 계속 말을 이어가고 있는데, 남편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