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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부모밑에서 못 배워서 그러지 뭐

by 티타임 스토리

이번에는 내가 먼저 물었다.


“그 여자분 이름이 뭔가요?”


“00 자매요.”


현관문을 막 들어서던 남편이 부목사님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그대로 멈춰 있었다.


“오빠, 저녁 얼른 먹어. 부목사님이 교회에서 오빠 인기 많았다고 하시더라.”


내가 남편이 쓸 그릇과 컵을 챙기고 돌아왔더니, 남편은 이미 손을 씻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형, 00 누나 얘긴 뭐야? 그 얘길 왜 한 거야?”


“제수씨한테 숨긴 게 없는지, 다 말했는지 확인하려고 그랬지.”


남편은 옆에 앉은 나를 쳐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어떤 얘기 들었는지, 그대로 말해줄 수 있어?”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오빠가 군인이었을 때, 00이라는 분이 임신을 했는데… 아버님이 반대하셔서 자살 시도도 했었다고…”


내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곧장 부목사에게 물었다.


“형, 무슨 소리야. 00 누나 임신한 거, 내가 그런 거 아닌 거 알잖아.”


부목사는 차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네가 아니라는 거 100% 확신해? 낙태했는데 누구 애인지 어떻게 알아. 너랑 상관없으면, 왜 장로님이 병원까지 계속 데려다주고 집사님이 매일 병문안했겠어.”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당혹스러움과 긴장감이 감도는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오빠, 미안한데 부목사님이랑 나가서 얘기 마무리 하고 와. 나는 별로 알고 싶지 않아.”


남편은 부목사를 데리고 나가며, 돌아와서 다 설명하겠다고 약속했다.


신기하게도, 화도 슬픔도 배신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심장이 쿵쾅거리며 온몸을 울렸다. 와인 한 잔을 가득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남편은 나를 속인 게 없다. 그저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뭐가 진실이든 이 일은 그에게도 충분히 큰 상처였을 것이다.


나는 원래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 일이 현재나 미래를 바꿀 수 없다면 그냥 'forget about it' 하고 흘려보내는 게, 내 마음속 구석에 늘 숨어 있는 우울에 잠식되지 않는, 내가 터득한 최선의 방법이다.


집에 돌아오면 안쓰러운 남편을 꼭 안아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교회에서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던 젊은 여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누굴까...' 생각하며 와인 한 잔을 더 마셨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남편이 돌아왔다.


거의 반이나 비워진 와인병을 본 그는 놀란 표정으로 옆에 앉아 내 손을 잡았다.


“정말로 내 애 아니야. 군대 가기 한 달 전에 사귀게 된 누나였어. 근데 어느 날 휴가 나왔더니 임신했다고 하더라고. 우리 아버지가 진짜 내 애 아니면 법적으로 책임질 각오하라고 해서 결국 수술했고, 나중에 알고 보니 나랑 사귀는 기간에도 남자가 두 명이나 더 있었더라. 엄마랑 아버지는 같은 교회 성도라 챙긴 거고, 나는 군대 있었던 거니까…”


“오빠, 나한테 굳이 설명 안 해도 돼. 오히려 어린 나이에 얼마나 괴로웠을까 싶어서 마음이 짠해. 다만 부목사가 이해가 안가. 너무 이상한 사람 같아...”


나는 남편을 안고 토닥여주었다.


“너한테 교회 가자고 말하기도 부끄럽다. 목회한다는 사람이 이상한 말 지껄이고, 그런 일까지 알리니...”


“괜찮아. 우리 좋은 교회 찾아서 같이 나가자. 아빠한테 들었겠지만 나 어릴 땐 성가대 반주도 했었어. 물론 교회 안에서 시기와 질투, 싸움도 봤지만 그래도 좋았던 기억도 많아.”


부목사의 불편한 말이 우리 사이에 틈을 주지는 못했다.



12월, 한국으로 돌아와 결혼 준비를 했다.


친척, 친구들을 만나 청첩장을 돌렸고, 드레스는 미리 영국에서 고른 다섯 벌 중 한국에서 입어보고 골랐다. 메이크업샵 예약은 사촌언니가 도와주었다.


결혼식 당일 상견례 이후 양가 부모님이 처음으로 다시 만났다. 아빠가 시아버지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이고 손을 잡고 '잘 부탁드립니다' 라며 인사를 건네는데 눈시울이 벌겋게 되어 있었다. 예식이 시작되기 전부터 눈물을 흘리던 엄마는 끝나고 나서도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딸 가진 부모는 어쩔 수 없이 약자가 된다라는 말을 절감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친구들과 가진 피로연은 4차까지 이어졌고, 그날 호텔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바로 시댁에 갔다.


시부모님댁은 매일 6시에 아침을 하셔서,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어머님과 함께 준비해야 했다.


시차에 고생하며 겨우 겨우 일어나 간단히 씻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내 인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이 말을 언젠가 꼭 해야겠다 벼르고 있다가 이제서 하는 건지, 어머님의 대답은 너무 뜬금없었다.


“난 전라도 사람 제일 싫어해. 전라도 사람 특징이 돈도 없는 주제에 자존심 부리는 거야. 나이 들어서 그것만큼 추한 거 없다! 너네 엄마 아빠는 사투리를 안 써서 몰랐는데 너네 할머니 사투리 듣고 진짜 어이가 없더라...”


멍해졌다. 결혼식이 막 끝난 다음날,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쩔 줄 몰라하며 서있으니 장갑과 가위를 건네며 조기 지느러미와 비늘을 다듬으라고 하셨다.


남편은 피곤해서 일어나지 못 해, 남편 없이 시어머니·시아버지와 불편한 아침 식사를 했다.


밥 한 공기를 다 못 먹고 두세 숟갈 남겼는데, 설거지하며 버리려고 하자 어머님이 소리를 지르셨다.


“쌀을 버린다고? 너네 집은 그랬을지 몰라도 우리 집은 교육자 집안이라 절대 그럴 수 없어. 점심에 저 남은 밥

꼭 먹어.”


정리를 마친 후 방으로 들어와 노트북을 하다가 늦게 일어난 남편에게 아침밥 남기고 혼난 얘기, 전라도 사람 싫다는 발언을 들었다고 전했다.


“내가 엄마한테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할까?”


“아니, 괜히 더 미워하실 것 같아. 그런데 나 충격이 좀 크다... ”


남편이 주방으로 가 내가 남긴 밥을 먹자, 어머님은 기겁하시면 말렸지만 남편은 아무 말 없이 밥을 다 헤치웠다.


그날 저녁은 첫째 시누이가 나와 남편을 초대해서 나가야 했다.


시부모님 두 분만 집에서 식사를 하는 게 마음에 걸려 닭볶음탕을 미리 해놓고 시누이 집에 다녀왔는데 돌아오니 닭볶음탕이 그대로 싱크대에 다 버려져 있었다.


남편이 너무 놀라 이걸 왜 버렸냐고 물어보니 "우리 고기 싫어한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시아버님은 닭볶음탕이 있는지도 모르셨는지 연신 "왜? 뭘 버려?" "왜?" 라며 분위기가 왜 이런지 물어보셨다.


교육자 집안이라 밥 두 숟가락도 못 버리게 하시더니... 내가 한 요리는 보란 듯이 버려두고 치우지도 않으셨다는 게 너무 당혹스러웠다. 내가 싫었으면 진작에 말씀하시지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이러시는 이유가 뭔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남편은 시누이가 우리만 초대해서 화가 나신 것 같다고 했으나, 마음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음 날은 1월 1일이었고, 떡국을 끓여보라 하셨다.


미리 찾아본 레시피로 고명도 예쁘게 만들어 올려 내었지만 한 입 드시더니 싱크대에 버리셨다. 간이 안 맞아서 못 먹겠다고...


아버님은 "난 괜찮은데..?" 라며 식사를 이어가셨고 남편은 "엄마가 한 것보다 훨씬 맛있는데 왜 그래? 라며 나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어머님은 밥으로도 차별을 했는데, 새로 한 밥은 남편·아버님·스스로 챙기고, 내게는 찬밥을 주셨다.


“며느리는 원래 찬밥 먹는 거다.”


나는 뜨거운 음식을 잘 못 먹어서 식은 밥이 그리 싫지 않지만 그 말에 가슴이 시렸다.


매번 식사가 끝나면 체해서 소화제를 먹거나 손을 따야했다. 안 먹고 싶어도 기분 나쁜거 티낸다고 하실까봐 안 먹을 수도 없었다.


다음 날 어머님이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한의원에서 남편의 한약을 지어왔다.


남편이 인상을 쓰며 마시는 게 웃겨서 쳐다보고 있으니 마시다 말고 나에게 "마셔볼래?" 라며 물었다.


내가 "아니 ㅎㅎ" 하며 웃는데 옆에 앉아 계시던 어머님이 들고 있던 효자손으로 내 다리를 치며 "남편 한약 뺏어 먹는 거 아니다"라고 하셨다.


순간 내가 달라고 했었나 착각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남편이 "엄마! 안 먹는다고 했잖아요. 먹는다고 했어도 효자손으로 사람을 때리는 게 어딨어" 라며 화를 냈다.


그리고는 산책 나가자며 나를 데리고 나갔다.


근처 편의점에서 따뜻한 음료수를 사서 아파트 단지 안의 놀이터로 갔다. 남편은 끊었던 담배를 피웠다.


"우리 엄마 왜 저러나 모르겠다. 저런 분 아니신데... 미안해... 조금 있으면 영국 가니까 며칠만 참자"


집에 돌아가니 아버님이 나와 남편에게 무릎 꿇고 앉으라고 하셨다.


남편이 며느리 앞에서 시어머님께 면박을 준다고, 나는 그걸 말리지 않았다고 각각 나무라셨다.


예전에 런던에서 남편이 나에게 무릎 꿇고 사과를 했던 게.. 집에서 이렇게 혼나서 그런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아무 말하지 않았고, 난 죄송하다며 용서를 빌었다.


곧 영국에 가는데 최대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좋은 마음으로 떠나고 싶었다.


그런데... 옆에서 지켜보던 어머님의 한마디에 분위기가 싸늘해져 버렸다.


"에휴 전라도 부모밑에서 자라서 못 배워서 그러지 뭐"


"엄마!! 진짜 왜 그러세요. 작작해요 좀!!!! " 남편 큰 소리로 외쳤다.


아버님은 다들 그만하라고 하시고 방으로 들어가기고, 큰 소리에 놀란 어머님도 기도하는 시간이라며 서재로 들어가셨다.


방에 들어와 누워있는데 눈물이 얼굴과 머리카락을 타고내려 베개를 적셨다.


"진짜.. 부끄럽다. 미안해"


남편의 사과가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았다. 우리 엄마 아빠가 알면 얼마나 속상하실까... 이런 상황이 올 줄 알고 그렇게 반대를 하셨던 걸까...


밤 새 훌쩍거리며 울다, 새벽에 아침 준비를 위해 일어났더니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어머님은 나를 보더니 "미안하다. 어제 기도하면서 나도 하나님한테 많이 혼났어." 라며 뜻밖의 사과를 하셨다.


오늘은 또 무슨 말로 내 가슴을 후벼 팔까 했는데 예상밖의 사과에 나도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그날 오후 친구와 카페에서 만났다. 남편이 공사 출신 장교라 나보다 일 년 먼저 어린 나이에 결혼한 친구였다.


시어머니 얘기를 하니 그나마 믿는 사람이니 잘못한 일은 알아서 회개기도하고 뉘우칠 거라 너무 걱정 말라고 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친정집에 들렀더니 엄마가 시부모님께 드리라며 백화점에서 산 골프복 셔츠와 조끼 세트 두 벌을 주었다. 영수증을 보니 120만 원이 훌쩍 넘는 금액이었다.


"엄마 왜 이렇게 돈을 많이 썼어"


시어머니는 선물 들어온 것 중 드시지 않아 처치 곤란인 싸구려 한과세트 보냈는데... 미안했다.


엄마가 선물 한 옷을 가져가 어머님께 드리니, 쇼핑백을 바닥에 툭 던지셨다.


"난 이 브랜드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해. 할인매장에서 제일 많이 보는 브랜드잖아"


"엄마, 백화점에 산 거 안 보여요?" 남편이 짜증을 내며 쇼핑백들을 들고 옷방으로 옮겼다.


어째서 뭔가를 해드리고도 자꾸 욕을 먹고 죄송해야 하고 눈치를 봐야 하는지...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차별과 부당함 그리고 모욕감이었다. 그렇지만 따질 수 있는 상대도 아니다.


엄마에게 잘 도착했는지 전화가 왔다.


"엄마, 시부모님이 선물 주신 옷 너무 마음에 들어 하셔. 색도 너무 예쁘고 디자인도 마음에 드신대."


거짓말을 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또 눈물이 났다.


영국으로 돌아가는 날 시부모님이 공항까지 데려다주셨다.. 엄마와 아빠가 시부모님과 마주치게 하는 게 싫어서 절대 나오지 말라고 했다.


공항에서 시어머니가 남편을 안고 인사를 한 후 내 손을 잡고 미안하다며 우셨다.


어머님의 눈물에 그동안 쌓인 서러움이 조금 녹았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 다음 날, 스페인으로 조금 늦은 신혼여행을 갔다.


마드리드의 한 타투샵 앞에서 남편은 서로의 팔에 타투를 새기자고 했다.


난 평소 문신을 하는 것에 선입견이 있어서 하고싶지 않다고 했지만 그는 작게 레터링을 하면 내 하얀 피부에 잘 어울리고 예쁠 것 같다며 설득했다.


나는 웬만하면 그가 원하는 대로 다 맞춰주고 싶었으나 타투는 정말 내키지 않았다.


그는 돌아가는 날까지 타투를 해야만 서로의 것이라는 증표가 생기는 것 같아 안심될 거 같다며 집요하게 요구했고 결국 나도 타투를 하게 되었다.




그때 했던 그 타투는 그와 헤어진 지 5년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내 팔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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