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 마드리드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다시 런던의 일상이 시작되었다.
그는 회사에서 친해진 한국에서 온 주재원들과 뉴몰든 (한인타운)에서 종종 회식을 했는데, 집에 올 때면 맛있었던 메뉴를 꼭 포장을 해서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의 배려가 늘 고마웠다.
2월부터는 유학생들로 거의 이루어진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목사님의 설교도 분위기도 좋았다.
등록할 때 교회 다닌 시기, 교회 방문 경로, 취미, 특기 등을 작성한 카드가 있었는데 특기에 피아노를 적어서인지 찬양팀 반주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성가대 반주는 해봤지만 찬양팀 반주는 해본 적 없었는데 보여주는 찬미예수 악보가 쉬운 코드로 구성되어 있어 어렵지는 않았다.
집에 저렴한 전자 키보드도 한 대 사서, 조금 더 세련된 반주를 위해 애드리브도 연습하고 다양한 반주법과 화성학도 공부했다.
남편도 찬양팀에 보컬로 들어왔다. 기교 없이 담백하게 부르는 그의 미성이 좋았다. 시부모님은 아들 부부가 드디어 교회를 정착해서 찬양팀에 들어가게 되었다며 기뻐하셨다.
"오빠 나 처음 만난 날, 내가 라테 주문할 때... 나 보고 Are you Korean?이라고 물었잖아. 내가 '네'라고 한국말로 대답했더니 활짝 웃었거든. 지금 생각해도 그 웃음은 가슴 떨리는 거 알아? "
"나도 너 처음 보자마자... 한국 사람이면 무조건 데이트 신청해야지 생각했어. 일하면서도 너 혹시 나갈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고. 매장에서 먹는다고 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번호 물어봤을 거야"
"지금도 오빠 보면 설레고 손만 잡아도 너무 좋아"
"나도 이렇게 팔짱 끼고 걷는 것조차 너무 행복해. 난 세상에 좋아하는 것들 관심 있던 것들이 너무 많았는데, 사람을 이렇게 좋아고 사랑하고 소유하고 싶어질 줄은 몰랐어.
여느 때와 마찬가지고 주일 예배를 마치고 다정한 말을 건네며 집에 돌아와 쉬는 중, 노트북을 켜서 아빠에게 이메일을 보내려고 하는데 전 남자 친구에게 메일이 와있었다.
자신의 부모님 중 한 분의 사생활이 몇몇 기자들에게 알려졌고, 곧 기사가 나올 것 같다며 사회적으로 매장당할까봐 너무 두렵다고 했다.
스무 살에 만난 전 남자친구와 나는 연인이도 했지만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그 애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집안의 문제들을 오직 나만 알고 있었고, 나 역시 그때부터 시작된 엄마의 도박 문제와 그로 인한 가족간의 갈등을 그 애에게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 계산 없이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고, 진심으로 응원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이였다.
얼마나 불안하면 오래전 헤어진 나에게 연락을 했을까... 걱정이 되었다.
'언론에 노출이 많이 되었긴해도 연예인도 아닌데 기사가 터지지는 않을 것 같으니 미리 걱정하지 마'라며 답장을 쓰고 있는데 소파에 앉아 있던 그가 다가왔다.
예전에 전 남자 친구를 마주친 후 돌변했던 그를 기억했던 터라 얼른 화면을 바꾸려고 하는 찰나 노트북을 낚아챘다.
메일 내용을 보더니 묻기 시작했다.
"이 새끼한테 결혼한 거 알려줬어?"
"아니"
"왜? 결혼한 거 말하기 싫었어?"
"그게 아니고, 메일 주고받은 거 봐봐. 그동안 연락을 한 번도 안 했으니 당연히 결혼 소식을 알릴 필요도 없었지"
그는 메일 수신내역을 살피더니 자신이 불러주는 대로 '나 결혼했어. 앞으로 메일 보내지 마' 이렇게만 써서 답장을 하라고 했다.
"... 답장을 차라리 안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 무조건 이렇게 보내. 네가 그 새끼한테 아직 미련 없다는 걸 증명하려면 이렇게 해야 해."
괴롭고 미안했지만 저렇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앞으로 수시로 내 메일함에 들어가서 전 남자 친구에게 이메일이 오는지 확인하겠다고 했다.
"이제 침대에 가서 누워"
무엇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지난번 기억이 떠올라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안 그런다고 했잖아..."
"난 싸움은 무조건 성관계로 풀어야 한다고 생각해"
난 또 한 번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15년간 이어진 결혼 생활 동안 갈등이 있을 때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나에게 강제적 '벌 주기'를 반복했고 난 이런 상황에 놓이지 않기 위해 싸우지 않는 방법을 택했다. 그가 바뀔 거라는 희망은 점점 사라졌고, 내가 느끼는 참담함은 점점 커졌으니까...
2005년 7월
혼인신고 한지 10개월, 결혼식 한지는 7개월이 지났다.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한국으로 휴가를 가려 하였으나 시부모님이 유럽 4개국 여행을 오시는데 2주 동안 한국에 없으니 오지 말라고 하셨다.
나도 엄마 아빠가 보고 싶었는데... 내년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시부모님의 유럽 여행 일정 중 영국은 가장 마지막 국가였고, 유로스타를 타고 런던에 오신다고 하여 세인트 판크라스 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가이드에게 얘기해서 이틀은 자유투어로 뺏다고 하셔서 남편과 내가 관광을 시켜드리기로 했다.
첫날, 비스터 빌리지 아웃렛으로 갔다.
시어머님은 이미 본인 것은 이태리와 프랑스에서 많이 사셨지만, 한국에 돌아가서 나눠 줄 선물을 준비 못하였다며 명품 안경테, 가방, 신발, 티셔츠 등을 구입하셨다.
버버리 매장에 들어가셔 스카프를 고르고 있는데, 큰 소리로 얘기하는 중국인들을 보며 나에게 속삭이셨다.
"에구... 전라도 같은 사람들이 여기도 있네. 어딜 가나 민폐야..."
더 가까이 있던 아버님과 남편을 두고 굳이 나에게 와서 귀속말로 저 얘기를 하셨다는 게 화가 났다. 무슨 의도를 가지고 저런 행동을 하시는 건지, 나를 어디까지 무시하고 멸시해도 되는 존재라고 생각하시는지.. 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쇼핑을 마치고 카페에 들렀다. 남편과 둘이 주문을 하러 걸어가며 어머님이 나에게 한 얘기를 전했다.
"난 만약 내가 아무리 특정 지역을 혐오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지역 사람을 가족으로 둔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티내지 못할 것 같아. 이건... 그냥 내가 너무 미워죽겠어서 일부러 괴롭히시는 걸로 느껴져"
"엄마가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야. 원래 전라도에 대해서 안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아. 그냥 무시해. 내가 미안해"
그가 미안하다고 하면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시부모님이 머물 호텔에 짐을 내려놓고, 런던 야경을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어머님은 소호의 한 기념품 가게에서 교회 사람들에게 줄 키링과 마그네틱을 고르시다가, 빨간색 런던 공중전화박스 모양의 귀걸이를 내 선물로 사주겠다고 하셨다.
"엄마 얘 니켈 알러지가 있어서 아무거나 하면 안 돼요"
"하얀 애들이 이런 쨍한 색 귀걸이하면 이뻐. 야 넌 시어머니가 선물 주는데 예의상이라도 해봐야 되는 거 아니니?
착용하고 있던 귀걸이를 얼른 빼고 어머님이 사주신 걸로 바꿔서 했다.
초등학생도 안 할 것 같은 싸구려 촌스러운 귀걸이가 찰랑거림을 느낄 때마다 부끄러웠지만 함께 있는 동안은 하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투어를 마치고 호텔 앞으로 모셔다 드리고 인사를 하는데 간질간질하던 귀가 만져보니 퉁퉁 부어있었다.
어머님이 내 귀를 보시더니
"꼭 뭣도 없는 애들이 쓸데없는 알러지는 다 가지고 있더라. 거지들도 요즘은 알러지 타령해서 음식 함부로 못 준대"
그전까지는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을 할지 몰라 어색한 웃음을 짓거나 못 들은 척했으나 이건 너무나 노골적인 언어폭력으로 느껴져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진물 때문에 잘 빠지지도 않은 귀걸이를 빼어 남편 주머니에 넣었다.
아버님은 늘 그렇듯 아무 말 없었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남편은 "두 분 남은 여행 잘하시고 조심히 돌아가세요"라고 인사를 하고는 나를 끌고 돌아섰다.
돌아서는 남편을 향해 어머님이 악다구니를 썼다.
"야 너도 같이 살면서 똑같아졌냐? 부모가 영국까지 왔는데 섭섭한 소리 한마디 했다고 그따위로 인사하고 가?"
돌아오는 길... 남편과 나는 둘 다 아무 말하지 않았다. 아니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서로 고민하고 있었다.
"오빠... "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시댁 갈등으로 이혼하는 사람들이 정말 있나 싶었거든. 그런데 이제 이해가 가. 그동안 어느 드라마에서도, 그리고 고부 갈등으로 올라오는 인터넷 글에서도 어머님만큼 며느리에게 험한 소리를 하는 걸 본 적이 없어."
"나랑 이혼하고 싶다는 얘기는 아니지? 내가 진짜 엄마랑 통화하면서도 매번 부탁하고 메일로도 신신당부하는데도 못 고치신다... 나도 미치겠어. 그런데 엄마는 바뀌기가 힘들 것 같아"
"... 내가 이해해야 된다는 소리야?
"아니야. 이해하라는 게 아니고 엄마 말을 한 귀로 흘리는 연습을 하면 좋겠어"
"말이라는 게 귀로 들어와서 마음에 꽂히는 건데... 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는데 그게 가능할까? 오빠는 직접 당하는 입장이 아니니 쉽게 얘기하는 것 같아. 우리 부모님께 그런 얘기 듣는다는 걸 상상만 해보는 거랑 직접 듣는 건 차원이 다르다는 걸 몰라"
"내가 못 그러시게 계속 얘기할게. 그러니까 이혼 얘기 같은 거 앞으로 절대 꺼내지 마. 무서워"
"우리 엄마랑 아빠가 결혼 반대했었잖아. 그래서 행복한 척하느라 항상 아버님 어머님이 얼마나 잘해주시는지 거짓말해왔는데... 앞으로도 이렇게 상처받는 일이 생긴다면 솔직히 얘기하고 다른 방법이 있는지 물어봐야 할 것 같아"
남편은 내가 친정 부모님께 얘기를 하겠다고 하니 많이 놀랐던 것 같았다. 그가 어머님께 무슨 얘길 어떻게 전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몇 달간은 어머님의 폭언을 듣지 않게 되었다.
2005년 12월...
2월부터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내 안에 신앙심이 있는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냥 교회를 다니는 교인인 거 같았다. 그럼에도 찬양팀 반주도 열심히 하고, 교회 봉사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난 진심으로 믿고 싶었다. 기도를 통해 내가 나아갈 길을 구하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주를 의지하고, 감사한 일은 주께 영광 돌리는 그런 삶을 나도 살고 싶었다.
내가 믿는 자가 되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던 건 딱 한 가지,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면 내 믿음 부족으로 발생한 거라는 생각이 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부모님은 가난 한 건 십일조를 안 했기 때문에, 병에 걸린 건 신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걸 늘 강조했기 때문에 나 스스로도 어느 순간부터는 약한 믿음은 고난의 원인이 될 거라는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2006년 1월, 교회에서 새 해 기도 제목을 내라고 했다.
난 기도 제목을 낼 게 없었다.
사실은 친정이 예전처럼 화목해지고, 물질적으로도 조금 더 풍요로워 지길 바랐다.
당시 경매에 넘어갈 것 같다고 했던 친정엄마가 혼자 살던 50평대 아파트는 아빠가 퇴직하면서 압류를 풀어 해결되었지만, 두 분은 여전히 별거하며 사셨고, 남동생은 전역 후 아르바이트를 두 개나 하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도 제목이란게 교회 안에 순식간에 퍼질 것을 알고 있어 알리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는 날 위해 진심으로 기도를 해주겠지만, 누군가는 그걸로 뒤에서 얘기하고 판단하는 걸 많이 와봤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2세를 갖고 싶다고 적었다.
"오빠.. 애기 갖고 싶어? 나 아직 졸업하려면 1년 반 남았는데..."
"응 난 빨리 갖고 싶어. 난 그냥 너 아기 키우면서 일 안 하고 살면 좋겠어. 내 와이프랑 아이 엄마로만..."
"어머님도 교사로 평생 일하시고 지금도 교장 선생님이고, 누나들도 약사, 학원 원장으로 다 일 하는데...?"
"그래서 그래. 나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회, 소풍, 졸업식, 입학식 한 번도 엄마가 온 적이 없어. 혼자서 열쇠로 문 열고 아무도 없는 집 들어갔던 기억은 지금도 슬퍼"
그의 어린 시절 얘기에 마음이 약해졌다.
"나는 네가 너무 예뻐. 그런데 가끔 불안해. 우리 엄마가 너 힘들게 해서 날 떠날까 봐. 그래서 애까지 낳고 온전한 가족으로 살면서 너를 꼭 붙잡고 살고 싶어"
"나무꾼과 선녀도 아니고... 애기를 원하는 건 아니고 내가 불안해서 그런 거네?
"아냐 애도 얼른 갖고 싶어. 우리 닮은 애기 있으면 얼마나 예쁘겠어
"난 강아지 키우고 싶은데... 일단 졸업은 하고 애기 갖도록 해보자. 졸업도 못 하면 우리 부모님이 너무 속상하실 것 같아."
소파에 나란히 누워 영화를 보다 잠깐 잠이 들었는데 남편이 노트북 앞에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아버님이 재직하는 대학교 조교와 바람이 났다고 어머님이 장문의 신세한탄의 이메일을 보냈다고 했다.
아버님의 외도가 걸린거만 이번이 4번째이며, 초등학교때는 어머님이 상대방 여성과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것도 목격했고, 고등학교 때 대학교 때는 바람이 나신 아버지 때문에 어머님이 쓰러져 입원까지 하셨던 적이 있었다며 털어놓았다.
가난과 병든 것도 죄라더니... 이것이야 말로 자신의 의지로 지은 죄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빠도 여자 문제로 엄마를 속상하게 했지만 아버님은 너무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키도, 체구도 작으시고 보통의 할아버지 같으신 외모는 물론이거니와 말씀 하실 때 '주님 감사합니다'를 달고 사셨기 때문이다.
"엄마가 너한테는 얘기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모르는 척해"
"어떻게 아는 척을 하겠어. 걱정 마"
그 일이 대해서 더 이상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니 남편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 말해주지는 않았다.
2006년 8월.. 마지막 학년을 남겨두고 한국에 2주 동안 다녀오기로 했다.
친정 엄마가 공항으로 픽업을 나오기로 되어 있어 친정에 먼저 들러 필요한 짐을 두고 하루 쉬었다가 다음 날 시댁에 가는 게 어떤지 어머님께 물었다.
"전라도 사람은 그렇게 가르치니? 어디 경우 없는 소리를 해. 무조건 시댁부터 들러야지. 시댁이 제주도라도 먼저 들르는 게 기본 상식이야! 너네 엄마가 상식이 없으니 너도 이상한 소릴 당연하게 하는구나"
"... 죄송합니다.. 바로 갈게요."
통화를 끊고 나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오빠... 나 벌써 어머님 마주칠 생각에 두렵다. 그리고 왜 항상 '너네 엄마', '너네 아빠'라고 하시는 거야? 사돈이라고 하지 않아?"
"엄마가 원래 좀.. 알잖아"
"아니, 형님들 시댁 어른들한테는 사돈어른이라고 하면서... "
말을 하다 보니 눈물이 왈칵 나왔다.
한국에 도착해서 마중 나온 친정 엄마에게 짐만 내려놓고 바로 시댁에 가야 한다고 했다.
엄마가 시댁으로 태워다 주시며 "열 시간 넘게 비행기 타고 왔는데 하루 쉬고 오라고 하시지.." 라며 안타까워했다.
시댁에 도착했는데 어머님은 친정에 하루 들렀다가 가면 안 되겠냐고 물었던 게 아직도 분하셨는지 신발 벗기도 전에 소리치며 화를 내셨다.
"너 들어오고 우리 집에 되는 일이 없어. 산이 결혼하고 장로님도(어머님은 아버님을 장로님이라 부르심) 시험에 빠졌다가 다시 일어나느라 얼마나 힘들었느지 아니?"
듣고 있던 남편이 소리쳤다.
"엄마.. 아버지 예전부터 바람피웠었잖아요. 그거 다 제가 이미 얘기해서 알고 있는데 왜 그런 소릴 해요"
어머님은 기가 찬 표정을 지으시다가 나에게 따져 물으셨다
"야 너 진짜 요망스럽다. 알면서 그동안 그렇게 모른 척하면서 안부 전화하고 했던 거야?"
나는 믿음이 부족한 내가 이 가정으로 들어와서 분란을 만들거나, 적어도 나로 인하여 가족에 근심이 되는 말이나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살고 있었는데 아버님의 외도까지 내 탓으로 돌리는 말에 마음이 무너졌다.
그럼에도 나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나 때문에... 일이 더 커지는 게 싫었고, 나만 참으면... 없었던 일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자려고 누우면 가슴이 답답해져 크게 숨을 쉬어야 했다. 남편은 왜 자꾸 한숨을 쉬냐고 물었지만 가슴이 답답한 걸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곤 잠이 들면 다시는 못 깨어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죽은 채로 발견 될 것 같다는 불안감에 눈을 감는 게 공포였다. 남편은 무서워하는 나를 먼저 재우려고 노력했지만 그가 먼저 잠드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낮에는 어머님의 전화가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정체 모를 불안감에 한 자리를 빙빙 돌며 스스로 진정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써가며 버텼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을 것 같은 공포로 눈물이 나고 온몸이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몇 년 뒤 호흡곤란으로 쓰러져 응급실에서 공황장애 진단을 받기 전까지 난 병명도 모른 채 스스로와 외로운 싸움을 견뎌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