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물가가 워낙 비싸다 보니 홈스테이 비용으로 월 150만 원이 나갔고, 용돈으로 월 60만 원은 나갔다. 월 지출을 150만 원 이하로 줄이기 위해서는 셰어 할 수 있는 방을 찾아야 했다.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는 언니가 한 달에 400파운드(당시 환율 80만 원) 더블룸을 소개해주어 들어갔다.
태어나서 누군가와 한 방을 써본 적이 없어서 이사 전부터 스트레스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룸메이트는 나보다 6개월 먼저 온 한국인 여학생이고 동갑이었다. 대학교 4학년을 앞두고 어학연수를 오게 됐다고 했다. 초밥집에서 서빙 알바를 하고 있어서 일주일에 이틀 쉬는 날을 제외하고는 마주치기 어려울 거라 했다.
'아르바이트... 나도 얼른 구해야 하는데...'
한국에서 체류 비용은 나름 넉넉하게 벌어서 왔으나, 영국에서 계속 공부할 수도 있으니 최대한 아껴야 했다.
대부분 남자는 초밥집 주방 보조, 운 좋으면 피자집이나 맥도널드 주방으로 들어갔고, 여자들은 아시안 레스토랑 웨이트리스로 일을 했다.
일을 구하는 방법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소개, 아니면 무작정 아무 가게에 들어가서 사람 구하고 있는지 물어보는 형식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엄마와 전화 통화를 했는데, 집이 경매에 넘어갈 것 같다, 돈이 없다, 어디가 아프다...라는 말로 통화를 마치고 나면 늘 우울해졌다.
'정작 내가 한국에 있을 땐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잖아... 아파트 두 채를 이미 날리고, 현재 살고 있는 50평대 아파트도 경매에 넘어가게 한 게 누군데... 내 인생에만 일단 집중하자...'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다가도, 한국에서 엄마나 도와주며 살걸 괜히 영국에 와서 엄마 혼자 있게 한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운 날이 많았다.
어느 날, 엄마와 통화를 하고 도저히 수업에 들어갈 마음이 생기지 않아 센트럴 런던에 갔다.
테이트 모던을 구경하고 템즈강변을 따라 계속 걷다가 프레타망제에 들어가서 라테를 시켰는데, 주문받는 동양인 남자가 한국인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자기도 한국 사람이라며 반갑다고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내가 괜찮다며 카드를 내밀었지만, 한국 유학생들 보면 돈 안 받는다며 극구 사양했다.
이런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동양인, 그것도 남자가 일하는 것은 본 적이 없었는데 키도 크고 훈남이라 뽑힌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주문한 라테를 마시며 과제를 하고 있는데, 아까 주문받았던 남자가 아르바이트할 때 입고 있었던 블랙 셔츠와 앞치마를 맨투맨으로 갈아입은 채 옆에 앉았다
"저 아르바이트 끝났는데 혹시 오늘 시간 되면 저녁 같이 먹을래요?"
처음 본 사람이랑 밥을 먹는 게 너무 어색할 것 같았지만 커피 값도 받지 않았던 호의를 생각하면 거절하는 것도 미안해서 "아... 어... 제가 3 존에 살고 있어서..." 우물쭈물 대는데 몇 살이냐고 물었다. 대답하니 자기는 나보다 4살 많고 대학원에 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내가 들어와서 주문하는데 예쁘게 생긴 학생이 스타일도 좋고 웃는 게 귀여워서, 자기 아르바이트 끝나는 시간까지 카페에 있기를 너무 바랐다며, 밥 먹는 거 부담스러우면 근처 펍에 가서 맥주 한잔하자고 했다.
밥보다는 맥주 한잔이 나도 편할 것 같아서 펍으로 갔다.
템즈강변이 보이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는데 점점 추워져서 안으로 들어갔다.
대학원에서 현재 공부하고 있는 것, 취미, 영국에 유학 와서 시간을 쪼개어 다녀본 유럽의 나라들 ...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이끄는 그는 조용하고 차분한 톤으로 집중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재밌었다.
기네스 2 파인트를 마시고 살짝 취한 내가 이제 그만 가봐야겠다고 하니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괜찮다고 거절했지만 지하철역까지 따라 들어와 버려서 같이 가게 되었다.
"주말에 뭐 해?"
어느새 말을 놓은 그가 물었다.
"대영 박물관 가보려고 했어요"
"누구랑?"
"혼자요."
"나랑 같이 가자. 혼자가면 심심하잖아."
"아... 네..."
얼떨결에 약속이 잡혔다.
그는 나를 집 앞에 데려다주고 들어가라고 했다. 가는 거 보고 들어가겠다고 하니 담배가 너무 피우고 싶었는데 참고 있었다면서 웃었다.
"옆에 있을 테니까 천천히 다 피우세요."
잠시 망설이더니 한 발자국 떨어져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긴 손가락에 끼워진 담배, 그리고 어두운 조명 아래 보이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연기가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의 약속이 벌써 기다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