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일어났는데 열이 나고 목이 너무 아팠다.
어제 저녁 쌀쌀한 날씨에 야외에서 맥주를 마셔서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룸메이트가 파라세타몰을 건네며 타이레놀 같은 거니까 먹고 우선 더 자라고 했다.
얼마나 더 잤을까... 핸드폰 벨소리에 전화를 받으니 어제 만났던 프레타망제 아르바이트 그였다.
"안녕? 잘 잤니?"
"감기에 걸렸나 봐요. 약 먹고 자고 있었어요."
"무슨 약? 감기약 있어?"
"룸메가 파라세타몰 줬어요."
"나 한국에서 가지고 온 종합감기약 있어. 가져다줄게."
"아니에요. 진짜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수업 끝나고 가면 4시쯤 될 것 같아. 문 앞에 두고 갈 테니까 메시지 보면 약 가져다 먹어."
약을 가져다주는 건 너무나 고마운 일이지만, 누군가 온다면 커피라도 내주고 잠깐이라도 들어오게 해야 할 텐데 난 룸메이트와 방을 쓰고 있고, 공용 거실도 없었다.
더군다나 예쁜 모습만 보이고 싶은데 두 번째 만남부터 초췌한 몰골을 보이고 싶은 마음은 더욱더 없었다.
열이 떨어지면서 땀이 났다. 조금 기운이 나자 바로 샤워부터 했다.
그가 오기 전 화장을 살짝 할까 했으나, 렌즈를 끼고 화장을 할 에너지까지는 없었다.
3시 50분쯤 그에게 전화가 왔다.
"5분 뒤쯤 나와서 약 챙겨 가. 문 옆에 두고 갈게."
"저 보고 가요. 저도 드릴 거 있어요."
옷을 챙겨입고, 모자와 안경을 쓰고 그가 도착 전 미리 나가 있었다.
그는 한국의 종합감기약을 포함한 4~5가지의 상비약과 방금 샀는지 따뜻한 치킨수프를 건네주었다.
정말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어제 처음 본 사람인데 아프다고 이렇게까지 챙겨줄 수 있는 걸까...
나도 며칠 전 M&S에서 사다 둔 쿠키와 초콜릿을 건넸다.
"들어왔다 가라고 하고 싶은데... 혼자 쓰는 방도 아니라서..."
"괜찮아. 약만 주고 가려고 했어. 그런데 화장 안해도 너무 예쁘다. 피부가 엄청 좋구나!"
그가 웃으며 잠시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더니 손을 흔들고 떠났다.
방에 들어와서 그가 건네준 치킨수프를 먹었다. 입맛도 없었지만 가져다준 성의가 고마워서 열심히 다 먹고 감기약도 먹었다.
이틀 뒤, 대영박물관을 가기 위해 러셀 스퀘어 역 앞에서 그를 만났다.
세 번째 만남이기도 하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통화를 하다 보니 어색함도 많이 사라졌었다.
박물관에 들어서자 이미 여러 번 와봤는지 익숙하게 나를 데리고 이집트와 아프리카관을 구경시켜 주었다. 사람들이 많아 복잡했는데, 정신없이 관람을 하고 있는 내가 누군가와 부딪히지 않게 신경을 써주고, 물어보는 것은 설명을 해주거나 찾아봐 주었다.
"커피 한잔 마시고 그리스관까지 구경하고 저녁 먹으러 가자.여긴 하루 만에 다 구경 못 해.“
관광 온 거 아니고 아직 영국에 있을 시간 많으니까 계속 오면서 천천히 구경하자고 했다.
그는 내가 모르는 분야에 많은 지식과 흥미를 가진 사람이었다. 클래식, 보사노바, 재즈, 와인, 미술사... 예술 계통으로 나가야 할 것 같은 그가 경제학 석사 과정을 하고 있는 게 의아했다.
박물관을 나오니 11월의 영국은 이미 어두컴컴했다. 크리스마스를 미리부터 부지런히 준비해온 런던의 거리는 반짝반짝 빛나는 조명으로 "너무 예쁘다" 소리가 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저녁은 어디서 먹을까요? 지난번 약이랑 수프 챙겨주셔서 빨리 나았으니 제가 살게요."
"우리 집 가자. 스테이크 굽고 파스타 해줄게! 나 요리 잘해."
"혼자 살아요?"
"응, 원베드 플랫에 혼자 살아."
혼자 사는 집에 가는 게 망설여졌다. 분명 좋은 사람인 것 같지만 아직은 모르기도 하고, 남자 혼자 사는 집에 간다는 게 겁이 났다.
걷다가 멈춰서 입술을 깨물고 있으니 그가 웃으며 말했다.
"지금 5시 10분이잖아. 딱 8시에 너네 집에 도착할 수 있게 해줄게. 요리 솜씨 자랑하고 싶어서 장도 보고 꽃이랑 꽃병도 처음으로 사서 장식해뒀어."
"아... 네... 가요..."
내키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건 더 싫었다.
얼스코트에 있는 그가 사는 플랫은 깔끔하고 고급스러웠다.
'이 정도면 한 달에 £1,000(당시 환율로 약 200만 원)은 할 텐데... 집이 잘사나 보다...'
또 괜히 기가 죽었다.
나를 소파에 앉게 하고 TV를 틀어준 후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앉아 있는 게 미안해서 보조를 시켜달라 했지만, 맛있게 먹어주기만 하면 된다며 나를 계속 소파로 돌려보냈다.
드디어 요리가 완성되고, 레드 와인을 따라주었다.
내 인생의 첫 와인... 긴장하며 첫 모금을 마셨다.
'맛없다... 으...'
쓴 것도 아니고, 단 것도 아니고, 향도 이상하고 도저히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가 물었다.
"맛없어? 못 마시겠어?"
"제가 와인을 몰라서요. 오늘 처음 마셔본거에요. 저는 포도주스랑 비슷한 맛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네요."
"아, 처음이야? 그럼 내가 입문자용 와인을 알려주지."
그러면서 또 다른 와인을 가지고 왔다.
"이게 포르투갈에서 생산된 포도로 만든 '포트 와인'이거든. 지금 이건 도수가 20%라 세긴 한데, 달아서 마시기는 편할 거야. 원래 디저트 와인으로 마시긴 하는데... 맛만 봐봐."
와인 잔도 새 걸로 다시 가져와서 따라주었다. 그의 말대로 달달해서 그런지 맛있었다.
그가 TV를 끄고 음악을 틀었다. 가수는 리사 오노, 일본계 보사노바 가수라고 했다.
음악도, 음식도, 와인도, 식탁 위의 꽃도, 그리고 무엇보다 내 앞에 앉아 있는 그와 대화를 하며 눈을 마주치며 웃고 있는 게 행복했다.
내가 기쁠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 조용히 숨어있다가 기어이 비집고 나와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만들던 우울감이, 이 순간만은 무력해진 것 같았다.
저녁 7시 40분. 바래다준다고 했다.
괜찮다고 했지만, 그의 고집을 꺾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집을 나와 역으로 걸어가는 길, 그가 내 손을 잡아 자신의 코트 속 주머니로 넣었다.
두근두근... 귀에서 내 심장 소리가 들렸다.
집 앞까지 왔는데 헤어지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담배 오늘은 안 펴요?"
"너 들어가면..."
"그럼 나 오늘도 담배 타임 할 동안 옆에서 기다릴래."
첫날 그랬던 것처럼 그는 또 한 발자국 떨어져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제 들어가."
내가 웃으며 "빠이~" 손을 흔들자 꼭 안아주고 나를 집으로 들여보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그와의 본격적인 만남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