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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 온 것 같아, 책이 영화고 사과가 팝콘이고

뒷자리 사수하는 아들 어록, 만 9세

by 여행하듯 살고

아들은 항상 뒷자리에 앉는다.

조수석이 비어 있을 때도 그런다. 습관이다.


우리 넷 다 외출할 때에는

엄마, 아빠가 운전선과 조수석을 다 차지하고,

나, 딸, 아들 셋이 나가는 날에는

엄마 운전석, 딸 조수석이 고정자리이다.

한때 누나랑 동생의 앞자리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깔끔히 정리되고는 더 이상의 분쟁은 없다.


그럼 나랑 아들이랑 둘이 갈 때에

아들이 조수석에 앉으면 된다.

그런데 몇 번 앞에 앉게 했더니,

내 운전에 방해될 때가 종종 있었다.


남자 애들 특유의 개구진 모습으로 정신없이 까부는데,

나는 참지 못하고 "너 이제 앞에 앉지 마, 사고 나겠어!"

라고 외쳐버렸다. 비슷한 일이 서너 번 반복되고는,

삼진 아웃을 깔끔히 받아들인 아들은 이제

비어있는 앞자리에도 별 욕심을 내지 앉는다.




아이들이 부쩍 커버린 게 아쉬운

요즘, 나는 예전 일기나 아이들

어릴 때 찍은 비디오를 자주 꺼내 본다.

그중에 발견한 보석을 소개하려고 한다.

아들이 만 9살 때 둘이서 차를 타고 가던 길이었다.


아들은 퍼시 잭슨이라는 아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책을 읽고 있었다.


퍼시 잭슨과 올림포스의 신


미국에서는 해리포터 다음으로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시리즈이다.

우리 아들과 딸 역시 해리포터에 한참 빠져있다가,

다음으로는 이 시리즈에서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다.

특히 아들이 대개 조용할 때 보면 그 책을 읽고 있다.

읽고 또 읽었다. 말 그대로 열 번 넘게 읽었나 보다.

까불고 틈만 나면 장난치려고 하는 그런 녀석이

집중할 때는 다른 사람으로 돌변한다.

세상모르게 빠져든다.


아들놈 저런 걸 보면,

내가 평소에 P라고 생각했던 아들의 기질이

(P의 특징: 충동성, 계획 없음, 잘 챙기지 않음)

혹시 ADHD 쪽인가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ADHD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증상:

대개 일을 미루어 놓음, 잘 챙기지 않음,

관심 있는 분야에는 초 과집중)


그날도 20분 거리의 수영장으로 연습을 가는 길이

었다. 아들은 사과를 먹으며 책에 코를 박고 있었다.

나는 졸음을 쫓으며 운전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들이 뒤에서 뭘 발견한 듯 나를 부른다


"엄마, 엄마~"

"응, 왜?"

지금 영화관 온 것 같아,
책이 영화고, 사과가 팝콘이고!


"진짜? 그렇게 재밌어?

엄마 차 영화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아들의 생뚱맞은 비유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사과를 어찌 팝콘에 댈 생각을 했는지,

요놈, 상상력이 유별나네.


아이의 신박한 표현이 좋아서 메모해 놓았다.

이년 반이 지나고 그 메모를 우연히 발견한 지금,

정말 그때가 사무치게 그립다.


단지 '책을 읽어서 좋다'는 얘기가 아니다.

흔들리는 차 안, 밝게 해가 들어오는 그때에 책 속

이야기에 너무 빠진 나머지 영화관 온 거 같다고

해맑게 외치던 그 녀석이 그립다.


손바닥에 펼친 책 한 권으로 여기 현실보다 더 큰

세상에 발을 딛고, 그 속에서 함께 모험을 떠났던 아들.

신나는 걸 발견하면 엄마를 불러 꼭 알려주고

싶었던 아가 같던 아들. 어디 간 거니?



여전히 그때처럼 뒷자리에 앉아서 가는 우리 아들.

이제 그의 손에는 책 대신 핸드폰이 들려있다.

유튜브 쇼츠에 정신 팔려 시간을 보내다 보면

감탄할 순간도 놓쳐버라는 듯하다.


보고 있는 순간 분비되는 도파민의 달콤함을 알기에

학교 수업에 지쳐 돌아온 아들을 잠시나마 쉬라고

그냥 둔다. 나도 그런 시간이 종종 필요하니까,

내가 그 맘 잘 아니까.


저렇게 조용히 핸드폰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들한테 이제 앞으로 와서 앉으라고 말할까 하다가,

이내 마음을 바꾼다. 어떤 풍경일지 뻔히 보여서 이다.


딸은 앞에 앉으면 문자 할 때도 많지만

그만큼 나한테도 시간을 할애해 주신다.

(그래, 우리 따님은 그러신다ㅎㅎ)

엄마의 하루가 어땠는지 가끔 묻기도 하고,

자기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재잘거리기도 한다.


그런데 아들은... 묻기는 한다. 기계적이어서 그렇지.

"엄마 오늘 어땠어요?"

먼저 묻는 아들한테 간단히 대답을 한 후,

"너는 오늘 학교 어땠어?"라고 물으면

"좋았어요"라고 대답을 한다.

난 다시 뭐가 ‘특히’ 좋았냐고 물으면

"Everything (전부요!)"라고 답한다. 항상. 변함없다.


내가 조금 더 캐물으려고 하면,

잠시 멈칫하다가 구연동화 하듯이 과장하며,

손짓 몸짓을 더해 똑같은 대답을 오버해서 해준다.

“에~~~~브리띵!”

귀찮은 건지, 진짜 특별하게 별 일이 없었던 건지,

나한텐 얘기하기 싫은 건지...


아들의 속내는 알 길이 없다.


내 질문을 듣고 기계적으로라도

대답한 걸 감사해야 하겠지.

비슷한 또래 아들을 키우고 있는 친구가

아들 청력에 진짜로 이상이 있는 줄 알고

이비인후과 가서 정밀 검사를 했다고 한다.

검사 결과는 정상으로 나왔다고.


그래 아들, 엄마 질문을 잘 듣고
대답해 준 것만 해도 고맙다.


뒤에 앉아 잘 쉬거라.

요즘 아이들 참,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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