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달리며, 엄마의 엄마를 생각해

가장 큰 불효는 멀리 사는 것

by 여행하듯 살고

달리는 길 위에서는 참 여러 생각들을 하게 된다.

그중에 제일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가족 생각.

구체적으로는 딸 아들 그리고 친정 엄마.


육아를 하면서 뒤늦게 깨우치게 되는 게 많다.

30년 전 엄마의 그 행동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과 행동에 오버랩되면서 자연스레

이해가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 엄마가 되어 보니 엄마 심정을 알겠다.


그래서 엄마가 그렇게 한 말 다시 하고 또 하고

그랬나 보다. 엄마처럼 잔소리하지 말아야지,

다짐했었지만 아이들한테 잔소리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다.

그런 상황이 오고야 만다.


반대로 엄청 화를 낼 것 같았는데,

막상 나한테 별 말 안 하고 넘어갔던 일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 심정을 알 것도 같다.

내가 혼날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게

엄마가 보기에는 내 잘못이라기보단 상황이 그랬거나

내가 더 속상해할 것 같아서 감싸고 넘어갔던 것 같다.


달리면서는 엄마 생각이 주로 나는데,

글을 쓰기 시작하니 아빠 생각이 진해진다.




10년 전, 조용한 주일 밤늦게 큰 언니에게서

보이스톡이 왔다. 언니는 흐느끼고 있었다.


“은영아, 너 여기 와야 할 거 같아.

아빠가 응급실에 갔는데, 응급실 도착했을 땐

이미 위출혈이 심해서 장기가 다 망가졌대.

가망이 없대. 얼마 못 버티실 것 같아.”


딸이 4살, 아들이 2살 때였다. 사실 그날 언니 전화를

받고부터는 기억이 끊어진 느낌이다. 불행 중 다행히도

남편이 부랴부랴 다음날 아침 한국 가는 비행기 표를

구했다. 가는 길 내내 울었다


아빠가 계시는 병원에 도착하기 전까지 딱 한 장면만

기억난다. 그 유일한 장면은 시카고에서 한국으로

향하던 비행기 안에서 딸이 나를 위로해 주던 것이다.

딸이 비행기에서 말을 너무 "잘" 들어서 놀랐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한참 유춘기 면모를 뽐내고 있던 딸이

내가 계속 우는 모습을 보니까 말을 진짜 잘 들었다.

순하게. 아직도 가장 강하게 기억나는 건

'아, 이렇게 말을 잘 들을 수 있는 애가 여태껏 그렇게

말을 안 들었던 것이란 말인가' 하고 받은 충격이다.


고맘 때 딸한테 화를 많이 내 보기도 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러던 우리 딸이, 내가 엄청 슬퍼하는 모습을

보니 그냥 말을 너무 잘 듣더라. 동생까지 내 말을 듣게

만들고. 한국 가는 비행기서부터 장례식을 마치고 다시

미국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내내 그랬다. 그때 깨달았다.


아 우리 딸한테 잘 먹히는 건 따로 있구나.

화내는 게 아니라 슬퍼해야 되는구나.

그럼 말을 더 잘 듣는구나….

그런데 딸 말 좀 잘 듣게 한다고

치른 비용 치고는 너무 비쌌다.




감사하게도 아빠의 임종은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미안한 마음도 컸다.

내가 아빠 임종 지킬 수 있게 아빠가

힘들게 약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몸 전체가 심하게 부어 있어서

엄청 힘드셨을 것 같아 너무 죄송했다.

가시는 길이 조금이라도 더 편 했어야 됐는데…


내가 도착하고 약을 끊자, 아빠 의식이 곧 돌아왔다.

멀리 사는 불효녀가 임종을 지킬 수 있게 아빠가

기다리고 계셨다. 눈을 뜨고는 나를 확실히 알아보셨다


아빠 미안해 멀리 살아서… 정말 미안해
빨리 와 보지도 못하고…


아빠도 뭐라 말씀하셨는데 산소호흡기를 끼고 계셔

알아듣기는 힘들었다. 엄마의 해석으로는 우리 세

자매 사이좋게 지내라는 거였다. 그리고는 곧 다시

의식이 없어지셨고, 20분 후쯤 돌아가셨다.


아빠가 간이 안 좋긴 했어도 그렇게 금방 가실게 아니

었는데, 요즘의 기술으로도 위 출혈은 막을 수 없다니

충격이었다. 그렇게 일흔도 안 돼서 일찍 가셨다.




장례가 끝나고 언니들은 집에 돌아간 후 엄마와 나랑

어린 딸 아들만 집에 남았다. 난 곧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니 최대한 엄마를 도와드리고 싶었다.


아빠 물건을 가능한 많이 정리해야 한다. 엄마가 아빠

드시라고 만들어 놓은 반찬이 냉장고에 한가득이다.

일단 그거부터 다 버려야 했다. 통 하나하나

꺼내 버리면서 또 내내 눈물을 쏟았다.


요즘 내가 하고 있는 건 아이들하고 남편

밥 챙겨 먹이는 게 거의 전부인데…

아빠 밥을 직접 내 손으로 한번 못 차려드렸었네.

진짜 불효녀다.


어쩌다 나는 이리 멀게 살게 되었나.

멀리 있는 거, 그 자체가 제일 심한 불효다.

명절 때마다 가 보지도 못하고 이제 혼자 사시는

엄마 돌보는 것도 언니들이 다하고…


이런 불효녀가 또 없다.

그 후부터는 밤늦은 시간이나 새벽에

한국에서 오는 연락이 참 무섭다.



그때부터 몇 년은 보는 것, 읽는 것마다 당신이었다.

아이들 동화책 읽어 주다가 울기 일쑤였다.

아빠 이야기나, 작별에 관한 이야기나, 살짝 아빠를

떠올리게만 해도… 눈물바다였다. 혼자 운전하고 가는

길에도 눈물이 샘솟았다. 나는 잊었지만 우리 딸이

기억하는 장면은 언젠가 밤에 내가 빨래를

개던 도중에 그렇게 오열을 했다고 한다.




벌써 십 년이 흘러서일까,

이제 아빠 생각보다는 엄마 생각을 많이 한다.

생각은 하면서도 용돈 조금 보내드리는 것,

가끔 전화드리는 것 말고는 별로 해드리는 게 없다.


그래도 내 기도제목 일 순위는 엄마다.

딸 아들 남편은 내가 지금 옆에서

잘 돌보고 있으니까 그다음이다.


아이들 둘 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면 한국 가서 살고

싶다. 6년 남았는데, 그때까지 우리 엄마 건강하시길.

더 미루지 말고 지금이라도 더 자주 엄마 뵈러 가고

싶은데, 현실에는 발목을 잡는 게 참 많다.


그럼 이제 전화라도 더 자주 드리자.
여러 핑계 그만 대고.

photo by Haydn Golden, Unsplash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