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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난 우아하게 육아할 줄 알았다.

우아는 개뿔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

by 여행하듯 살고

10시간 진통, 1시간 힘주기 끝에 아가를 만났다.

2011년 4월 첫 출산. 자연분만, 3.8Kg 여아.

벌써 14년 하고도 6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날의 기억은 생생하다.


아가가 나오자마자, 간호사가 남편에게

탯줄을 함께 잘라보겠냐고 물었다.

곧 내 회음부를 꿰매고 뒤처리를 했다.

그리고는 곧 나에게 다가와

아기를 지금 안아보겠냐고 물었다.


나는 "아니, 지금은 말고.
(No, not right now)"라고 답했다.


죽을 듯 아팠다. 짐승이 된 것 같았다.

무통천국을 맛보지 못했고,

회음부를 꿰매는데도 심한 통증이 느껴져서

중간에 멈추고 마취를 더 했는데도 계속 아팠다.


마취 후에도 내가 너무 아파하며

제발 조금 쉬었다가 하자고,

거기 좀 그냥 잠시라도 내버려 두면 좋겠다고…

계속해서 괴로워하자 의료인들이 당황해했다.

하지만 그들이 어쩌겠는가.

마취를 계속 더 해도 아프다는 걸.

잠시 내버려 두고 기다려 줄 수도 없었나 보다.

그렇게 고문당하는 듯한 심정으로 견디다가 겨우

끝났다. 아가를 바로 안아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남자들이 모이면 결국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를 하는 것처럼,

아줌마들이 모이면 그처럼

각자의 출산 장면을 풀어낸다.

출산의 고통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건지

선배맘들한테 많이 들어와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었다.


그러나 준비하는 건 준비일 뿐이다.

직접 겪어보지 않은 자들은

아무리 들어도 절대로 알 수 없는 경험이다.

진짜 죽음의 문턱까지 밟고 돌아온.




간호사가 지금 아기를 안아보겠냐는 말에,

예스를 할 수가 없었다.

찢어졌다 꿰매어놓은 회음부와 출산 직후

전신이 아직 너무 아파서 심하게 무기력해졌다.

기다려왔던 아기였지만

당장 안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함께 있던 친정엄마는

너 정도면 순산이야,라고 했다.

그 말이 나에게 상처가 됐다.

다들 비슷한 경험을 한다고,

개인의 경험이 별게 아닌 건 아니다.


그래, 인정한다. 기록으로만 보면,

난산 아니고 순산 맞다.

그런데 정말 죽음을 맛본 거 같았다.

그런 공포와 무기력감을 전에 맛본 적이 없었다.




삼십 분인가, 한 시간인가 흘렀을까

마음을 추스르고는 아가를 안았다.

드디어 만났다. 참 예뻤다.

이렇게 예쁜 아가 만나려고

그렇게 힘들었구나.


아기는 새근새근 잠들었고, 나도 자고 싶었다.

그런데 젓을 돌게 마사지를 해야 한다고 한다.

아직 밑도 빠질 듯이 아프고

가슴은 불어와 통증이 시작된다.

아가가 입에 문 젖꼭지도 상처가 생긴 듯 아프다.


출산 직전까지 입덧이 힘들다는 것,

배가 무거워 불편해서 잠을 못 잤다 했던 것

등은 배부른 소리였다.

출산의 고통이 사라지기도 전에, 젖 마사지와 수유,

갓난아기돌보기로 새내기 엄마들은 내몰린다.


두세 시간에 한 번씩 젖을 물려야 한다.

회복이 다 되지 않은 몸으로

갓난 아가를 종일 돌보아야 한다.

그래, 나도 이런 현실을 자세히 알았다면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며 많이 망설였을 테다.


자세히 모르니 저질러 버린 거다. 이런 현실을

왜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나 일종의 배신감까지

들었지만(사실 육아 선배맘들이 이야기해 주었었다.

내가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가가 크면서 누리는

행복 덕분에 그 고통을 충분히 참아낼 수 있었다.


뒤돌아보니, 출산부터 하루도 쉴 수 없는

육아전쟁을 했다. 그래 그 전쟁 중에

"우아"라는 단어는 낄 곳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모든 '날 것'을 만날 수 있었다.
순수한 기쁨, 행복, 좌절, 무기력까지.




출산 무용담을 엄청난 모험처럼 신나게 얘기하는

아줌마들을 보면 신기하다. 나는 아직도 그 일을

웃으며 얘기하기 힘들다. 그때 생각하면 인상부터

쓰게 되고 힘들게 기억을 헤집어야 한다.


내가 보통 사람 보다

통증에 대한 역치가 많이 낮은 것인지,

아기 낳은 후 할만했다는 사람들 보면 믿을 수가 없다.

나는 정말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기억인데 말이다.


그러고 만 2 년도 안 돼서 둘째가 세상에 나온 게

계획한 거라는 사실을 보면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 맞나 보다.



신생아를 벗어나도 역시 만만치 않았다. 육아는

나를 갉아먹는 일 같았다. 그래서 친한 친구가

임신을 할까 말까 고민할 때 나는 자신 있게

노키드를 권했다. 딩크족 같은 비슷한 개념이다.


그랬다, 그랬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드는

또 쉽지 않은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 내가 평생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은

'우리 딸 아들을 낳은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아이들의 어릴 때는 그런 고백을 하지 못했다.

진심에서 그런 말이 우러나지 않았다.

가끔 아가들을 두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엄마를 보면 신기하게도 했다. 가식 같기도 했고.

그런데 나도 이제 진심으로 그렇게 고백한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한 일은
우리 딸 아들 낳은 것이라고


15년 가까이 육아를 하면서 힘든 게 진짜 많았는데

그걸 다 덮을 만큼 행복한 순간은 더 많았다.

삶의 의미를 더 깊게 만들고

모든 감정들을 한끝 더 깊이 맛보게 해 주었다.

그래서 우아하지 않아도 다 괜찮다.

그 이상의 것을 맛보았으니까.



이렇게 노키드 전도사가 어떻게 그 일을 사임하게

됐는지 그 배교 이야기를 담은 내 지난 글을 추천한다

[노키드 전도사? 어느 노키드 전도사의 배교]

https://brunch.co.kr/@like-a-traveler/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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