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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나간 카르페디엠

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지금을

by 여행하듯 살고

장미 다발을 쓰레기통에 구겨 넣었다.

아이들 도시락 싸며 아침 준비를 하는 중이다.

싱크대 옆 꽃병 안에서 시든, 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장미는 성가실 뿐이다.


그래, 일주일 넘게 예쁘게 봤으니 됐지 하고

쓰레기통에 얼른 집어넣었다.

긴 줄기를 반으로 꺾어서.


분주한 아침,

쓰레기통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계란껍데기 넣느라 열고,

양파껍질 처리하려 다시 열고,

오렌지 껍질 버리느라 또 열었다.

열고 닫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분명히 시들어서 버려버린 장미인데,

누워있는 옆태가 너무나 아름답다.

선명함이 조금 빠지긴 했어도

아직 색깔이 다 바라지 않았다.

탱글탱글한 싱그러움은 사라졌어도,

나 여기 있어요 하고 여전히

그 예쁨을 뽐내고 있었다.


다시 쓰레기통을 열어서

아이들이 먹다 남긴 걸 버리려다가,

“아, 너무 예쁜데…“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옆에서 밥 먹던 남편이 "글 쓰면 되겠네"라고 말한다.



요즘 작가병에 걸린 날 놀리는데 재미 들린 남편이다.

내가 노트북을 뚫어져라 보고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꼭 한마디 한다.


작가님 또 글 쓰셔요?


그럼 나는 쇼핑하던 아마존을 덮고,

스윽 브런치 작가의 서랍을 연다.


남편이 등이 아프다며 안마를 해달라고 난리다.

졸라댄지 꽤 돼서 모른 척할 수가 없다.

안마를 시작하니 오른손 엄지 아픈 게 시큰거린다.


나 요즘 글을 많이 써서 엄지가 아픈 거 같아


이 한마디로 난 작가병 중증환자가 되었다.

남편은 배꼽을 잡고 떼구르 굴렀다.

나, 졸지에 개그맨까지 되었나 보다.

엄지기부가 진짜 욱신거려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글은 무슨, 장미나 살려야겠다.


아직 더 볼 수 있는 장미를 너무 빨리 버린 것 같다.

다행히도 쓰레기를 꽃잎에는 전혀 닿지 않게 버렸다.


그래 다시 생명을 주자.


반으로 꺾어서 버린 진분홍의 장미를

쓰레기통에서 건져 올렸다.

같이 올라온 쓰레기들을 털어낸다.

꽃잎이 안 상하게 조심조심.


꺾인 줄기 부분을 싹둑, 다 잘라내고

열 송이가 넘는 큰 장미를 한 다발로 묶었다.

그리고 머그컵에 꽂아 주었다.

아직 아름답다.


이렇게 예쁜 애들을 전성기 끝났다고

뒤도 안 돌아보고 보내 버렸다니.

내가 너무했네.

장미야, 미안했다.


사진을 화사하게 수정해서 실제보다 더 아름답게 보인다.

그리고 사진을 남겼다.

아까 쓰레기통 안에 있던 모습도 사진으로 남길 걸.

아, 심지어 이 꽃이 제일 예쁠 때 사진을

한 장도 안 남겼었네.

뭐가 이리 바쁜지…

애들 도시락 싸느라, 라이드 하느라,

밥 간식 준비 하느라… 정말 정신이 없다.


널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기억해 주지 못해 미안해.
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지금을 간직할게.


이 장미를 보면서

내가 바쁘다고 놓쳐 버렸을

다른 순간들도 살펴본다.

아직, 나름 생생한 이 장미에게 실수한 것처럼

내가 휙 내던져 버린 건 없는지.




브런치 제13회 출판 프로젝트 응모를 목표로

두 권의 브런치 북을 완성했다. 원래 연재 중이던

브런치 북을 대충 마무리해 응모했다.


아직 마감 기간이 남았길래 충동적으로 부랴부랴

막 써버린 브런치 북을 하나 더 제출했다.

응모하려고만 글을 써온 건 아닌데, 출판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지다 보니까 발표만 기다리게 된다.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몰라서, 읽기만 하면서.


2주일 넘게 글을 안 쓰는 걸 남편이 눈치를 챈 걸까?

쓰레기통 안에 장미를 아까워하는 나를 본 남편은

대번에 훌륭한 글감 물어다 주었다.




장미에 대해서 끄적이다가 나의 글쓰기도 돌아본다.

글을 쓰는 순간이 좋고, 내가 쓴 글을 읽는 게 재밌다.

내 글을 읽어 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게 너무 감사했다.


그러다 욕심이 생겼다.

글쓰기의 꽃을 출판이라 여겨 탐했다.

그 리즈 시절을 맞이하기 위해서,

종이 책을 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매년 2월에

Run Gasparilla라는 유명한 덜리기 대회가 열린다.

거기에 하프 마라톤 대화를 신청할까 했다.

하지만 러닝 대회는 책 출간 전에는 나가지 않겠다고

혼자서 다짐하고 남편한테 선포까지 했었다.


그 다짐 때문인지 출간에 대한 소망이 더 간절해졌다.

그 소망이 커질수록 지금 이 순간을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어졌다.


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라는 뜻의 라틴어


계속해서 미래를 쫓아가면서

현재를 즐길 마음의 여유를 자주 잃는다.


오랜만에 시간 여유가 있는 날이다.

덕분에 장미를 쓰레기 통에서 건져낼 수 있었다.

청소하고 빨래하는 도중 잠시 멈추어 보기도 한다.


아직 눈부신 생명을 뽐내는 장미를 본다.

그 장미만큼 아름다울 지금 이 순간을

맘껏 즐기지 못하는 건 아닌지 돌아본다.

동시에 집 나간 카르페디엠을 다시 불러들인다.


감사절이 다가오고 있다.

11월 넷째 주 목요일 땡스기빙데이.

미국에서 가장 큰 명절 두 개를 꼽으면

11월에 땡스기빙과 12월에 크리스마스이다.

한국의 설이랑 추석처럼 온 가족이 다 모이고

음식이 넘쳐나고 고향을 찾는 추수감사절.


감사절을 기다리며 감사제목들도 무르익는다.

2025년 글 쓰며, 달리며 내 삶이 한껏 풍성해졌다.

이걸 다 즐겁게 이어갈 수 있게 해 준

브런치에게 무한 감사를 드린다.

좋은 자극을 준 많은 러너님들께도.


사실 글 쓰고 응모할 때만 해도 만에 하나의

당선 가능성을 두고 정말 부풀어 있었다.

응모한 후 여러 작가들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을 비우게 된다.

내가 봐도 '아, 이 작품은 정말 되겠다'

하는 작품들이 벌써 스무 개가 넘어선다.

내 작품은 어디 명함도 못 내밀겠다.


그래도 괜찮다. 당선이 되던 안 되던.

이제 나는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나는 글을 쓰며 이 순간을 즐기고 있다.


생기를 잃어가는 장미에게 다시 기회를 주었다.

덕분에, 불씨가 꺼져가던 내 글쓰기도 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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