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야 할 시간, 그리고 거기에서
돌아보니, 참 행복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기쁨과 설렘과 행복의 순간들이 많았죠.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지구 상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밴쿠버는 두 번의 진한 만남으로 제 가슴속 깊이 남아있는 안식처입니다. 제게 밴쿠버는 치유와 배움의 땅이죠. 2005년 먹구름 가득한 밴쿠버의 가을 하늘을 뒤로 하며 '이민은 절대 싫다'며 떠났던 밴쿠버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너무 그리워서.
날개를 다친 새처럼 심신의 상처와 함께 모든 익숙한 것들을 뒤로하고 떠나와야 했습니다. 기대도, 바람도, 계획도 없이 날아왔지만 밴쿠버는 아낌없이 자신을 열어 환영하고 돌보아 주었죠. 소중한 사람을 만났고, 아름다운 자연의 품에 안겼고, 텃밭에서 수많은 생명들과 교감하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따뜻한 추억, 언제든 찾아들어갈 수 있는 깊은 고요, 쉽게 흔들리지 않는 안정과 자유. 내가 정확히 기대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어쨌건 밴쿠버는 저의 성장을 도왔죠.
이 글은 벌써 잊히려 하는 지난 9년간의 밴쿠버에서의 삶에 대한 기록입니다. 제 40대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했던 밴쿠버와의 사랑 이야기죠. 혼자 가슴속에 간직했던 이야기들을 펼쳐보며 많은 분들을 떠올렸습니다.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밴쿠버 아니라 그 어디에서라도 알게 모르게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하며 사랑하며 배우며 성장하고 있을 사람들. 그분들에게 마음으로부터 깊은 지지와 응원을 보냅니다.
"우리가 계획했던 삶을 놓아주어야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가질 수 있다." - E.M 포스터
저는 이미 5년 전에 밴쿠버를 떠나왔습니다. 밴쿠버에서 배운 것들을 자양분 삼아 인생 2막을 시작했죠. 그냥 시작했습니다. 어디서 끝날 지 모르는, 어디로 가야할 지를 정하지 않은 채 새로운 여정에 뛰어들었죠. 인생이란 내 의도에 따라 애쓰며 열어가는 길이 아니라 대양을 유영하듯이 내 앞에 펼쳐지는 길을 겸허하게 따라가는 것이라는 걸 가슴깊이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시작하는 지금도 밴쿠버입니다. 코비드로 인해 3년만에 다시 밴쿠버를 찾고보니 밴쿠버에서의 지난 시간들이 너무 감사하고 특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평소 상처나 치유같은 말을 언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왠지 그렇게 말하면 더 나약해질 것 같아 오히려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누구라도 치유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죠.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살아오면서 누구나 이런 저런 상처를 받으며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예외일 수 없었죠. 지금까지 어떤 이유에서든 미처 관심 기울여주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상처받은 시간은 언제라도 치유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제게는 밴쿠버가 그런 곳이었죠. 알게 모르게 몸과 마음에 쌓인 상처를 치유하고 새살을 돋게 했던 치유의 땅 말입니다.
어디 저 뿐만일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도처에서 우리는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해서, 보다 의미있는 삶을 위해서 저마다의 전장에서 홀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죠. 때로는 적극적인 지지와 도움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나만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음을 확인할 필요도 있습니다. 안심이 되죠.
여기에 쓰일 글들은 너무 쉽게 잊힐까 봐 기록해두고 싶은 추억들, 말로 다하지 못했지만 마음 깊이 전하고 싶은 고마움, 함께 나누면 더 커지는 행복한 이야기들 입니다. 혹시라도 지금 이 순간 어디에서든, 어떤 이유에서든 필요한 치유와 회복의 시간을 갖는 분들,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감지하고 자기에게 맞는 삶을 의문하고 찾아가고 싶은 분들에게 용기가 되고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