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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네가 눈 길도 주지 않았잖아

by 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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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시간은 빨리 흐르는 법이다. UBC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지려고 할 즈음 마음 한 켠에서는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가 시작되었다. 쓰던 학위 논문을 잘 마무리해서 통과도 해야 하고, 돌아가면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방향도 정해야 했다. 1년이라는 공백기가 있다 보니 새로운 일을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마음을 먹고 있으니 UBC 세인트존스 칼리지 대학원생들이 함께 뭘 해보지 않겠냐며 많은 제안을 해 오기 시작했다. 동유럽 쪽에서 온 대학원생은 테니스를 같이 치지 않을 거냐 물어보기도 하고, 또 어떤 대학원생은 하이킹 같이 갈 생각 없냐고 물어오기도 했다. 또 어떤 대학원생은 자기에게 명상 좀 가르쳐주면 안 되냐고 제안을 하기도 했다. 2달 후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린 대학원생들이 여기저기서 함께 교류하며 지내자는 요청이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물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나는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하고 있는데?" 어린 대학원생들은 한결같이 대답했다. "네가 눈 길도 주지 않았잖아? 우리는 널 너를 눈여겨보고 있었어. 동양에서 온 불교를 전공한 여성이 왔으니 당연히 우리는 관심이 많았지. 네가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언제쯤 말을 걸어올지 기다리다가 이렇게 시간이 지나버린 거야." 너무 의외의 대답이었다. 사실 혼자서 낯선 곳에서 적응하는 일이 쉽지 않았기에 누구든 호의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면 내가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아무도 제안을 안 하니까 나는 나대로 영어 가르쳐 줄 사람을 찾아서 기숙사 전체에 공고를 내서 1주일에 1번 만나서 프리 토킹을 하면서 지내오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왜 지켜보기만 했냐고 다시 물어보았다.


다시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너를 존중해서지. 네가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호감을 보여야 우리도 적극적으로 다가섰을 텐데, 네가 눈길도 주지 않으니 우리는 네가 그런 의사가 없는 줄 알았지."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서양사회에서 남녀가 격의 없이 지내는 줄 알았지만 모르는 사람끼리 가까워지는 데는 그들 나름이 룰이 있었다. 호의를 보내는 학생들이 모두 남학생들이었던 점에서 그들은 여성인 내가 조금이라도 호감을 보여줬어야 했던 거였다.


나는 한국 귀국을 2달 앞두고서야 드디어 세계 각국에서 날아온 어린 남자 대학원생들과 테니스도 치고, 하이킹도 가면서 친분을 쌓을 수가 있게 되었다. 아이들이 젊다 보니 적극적으로 안내도 하고 아는 것도 많아서 좀 더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너무 늦은 감이 있어서 아쉽기는 했지만 그렇게라도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또 다른 경험을 할 수가 있어서 참 소중한 순간이었다.


세월이 지나서 생각을 해보니, 그때 명상을 가르쳐달라는 학생들에게 정기적으로 명상 가르쳐주는 일을 시작했었어야 했다. 2달밖에 시간이 남지 않아서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고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던 것이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최소 한 번이라도 모여서 명상도 알려주고 인연을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어야 했던 거였다.


어릴 때는 왜 그렇게 생각이 많았을까? 앞으로 재고 뒤로 재느라 많은 시도를 놓쳤다. 시도를 하면 배우는 것도 있고 앞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대안을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생각이 많아서 그냥 포기해 버린 일들이 아쉽게 느껴졌다. 알고 보면 이 '생각 많음'이 우리 삶을 얼마나 제한하는지 모른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머리로 생각하면서 기회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를 성장시킬 수 있는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무수히 잃어버리며 산다.


이유야 어쨌든,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어서 그렇게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남은 날은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 다짐해 본다. '응무소주이생기심'. 불교 금강경에 나오는 말로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앞 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시도해 보는 거다.


내가 그들에게 눈 길을 주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것도 너무 생각이 많아서 조심해서 살아서 일 수도 있다. 편안한 마음으로 조금만 다정하게 대했더라면 그들도 다가오기가 조금은 더 쉬웠을 것이고, 짧지 않은 체류 기간을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하며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난날을 후회하는 것이 아니다. 돌아보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보이는 거다. 마음을 단순 명료하게 가지고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주위가 돌아봐지고 좀 더 친절하게 주위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좋겠다는 거다.


삶이 나아질 기회는 언제든 가능하다. 포기하지 않고 무뎌지지만 않으면 언제든 우리 삶은 좀 더 온전해지고 자유로워진다. 갑자기 그 친구들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모를 그 친구들에게 고마운 마음과 잘 살라는 축원의 마음을 보내본다. "고마왔어. 잘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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