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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척거리다

by 맑은돌

월요일 새벽, 나는 다시 A은행 지점장 앞에 섰다. 가슴 구석이 여전히 뛰었다. 회계 매니저를 제외한 회계부서 전원은 지방의 하치장으로 출장을 보냈다. 그리고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검찰에서 발급된 공문 원본을 수령하여 T집행기관에도 접수시켰다. 통역 직원 투(Thu)가 직접 접수하러 갔었는데, 또 여자 집행관 응안(Ngan)이 접수증에 단서 조항을 끼워 넣으려 하자, 투(Thu)는 그 종이를 빼앗아 찢어버렸다고 했다. 그녀가 작성 중이던 접수증을 찢고 규정대로 접수일자 그리고 접수자의 성명만 적으라고 요청했더니 당황하더라면서 그녀의 일그러진 표정도 함께 전해주었다.


다행히 A은행에서도 잘 협조해 주었고, 주말에 검찰에서 발급된 3개월간 집행을 중단한다는 공문만으로도 집행기관은 벌써 겁을 먹었다. 그리고 같은 날 오전, 검찰의 다른 부서에서 T집행기관 보관 서류에 대한 압류 예고 공문이 추가로 발급됐다.


이렇게 월요일 은행이 마감되는 시간인 4시까지 회사의 자금은 집행기관으로 인출되지 않았다. 모두에게 감사하며, 지금껏 졸이던 마음을 조금은 풀어놓았다. 이제 회사의 자금은 집행기관으로 인출되지 않을 것이다.


월요일 오후 4시, 은행이 업무를 종료한 것을 확인한 뒤에 백 변호사의 광야 로펌으로 방문했다. 그리고 변호사로부터 신기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변호사님. 이 문서는 저희 쪽에서 발급받은 게 아니라고요?" 어제 검찰에서 받은 문서를 가리키며 백 변호사에게 되물었다.


"네, 저도 처음에는 저희 로펌에서 요청해서 발급받은 건 줄 알았는데, 저희 쪽이 발급받은 게 아니더라고요. 재차 확인해 봤는데, 저희가 요청한 부서에서 나온 서류가 아니었어요." 그는 다시 서류를 만지작 거리다가 말을 이어갔다. "오늘 아침에 발급된 압류 예고 공문이 저희가 요청한 그 서류거든요. 이미 자금 인출을 정지시킨 공문이 발급된 상태라서, 그래서 지난주 로비 자금 1억 동은 반환됐습니다." 그리고 돈이 담긴 서류 봉투는 다시 내 손으로 돌아왔다. 괜히 서류 봉투가 더 가벼워진 느낌이다. 무언가 안도감 같은 것이 들긴 했다.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한다는 심리적인 부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건 왜 다시 돌려주는 거죠? 혹시 저희에게 불리할 수도 있는 건가요?" 나는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백 변호사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렇진 않을 거예요." 그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게 굉장히 특이한 경우이긴 하거든요. 로비 자금이 다시 돌아온다는 게요. 그쪽의 설명에 따르면, 본인들이 로비하려고 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검찰의 다른 부서에서 유사한 효력을 갖는 서류가 발급됐기 때문에, 그래서 다시 돈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자기들이 한 것이 아니라 돌려준다는 건데." 백 변호사는 돈이 들어있는 서류 봉투를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그의 왼손에 찬 가민 스마트 워치가 보인다.


"사실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어쨌든 집행기관의 서류를 압류하겠다는 공문도 발행이 됐고." 그는 다시 한번 말을 끊고 테이블의 유리를 몇 번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러고는 본인에게 자문하듯 말했다. "그렇게 자기네들이 로비한 결과라고 하면서 돈을 그냥 받으면 우리가 알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걸 다시 돌려주네요." 백 변호사는 이런 사례가 특이하다면서 신기하다는 듯 옅은 웃음을 짓고 있다.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정리가 안 됩니다. 법원 로비를 말한 게이트엔 송금하지 않았고, 검찰 쪽으로 간 돈은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공문은 발급됐잖아요?" 나는 마저 물을 마신다. 아무래도 우리가 계획하지 않았던 플랜 B가 스스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 같다.


"혹시 게이트 로펌에서 돈 달라고 연락 안 오던가요? 자기네들이 로비한 거라고 주장하면서 대가를 달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백 변호사는 무언가 게이트 로펌 쪽에서 움직임이 있을 것 같다며 나에게 질문을 했다.


"안 그래도 그 로펌에서 연락이 왔었어요. 자기들이 약속대로 공문을 발급했으니까 짱(Trang) 변호사에게 4억 동의 돈을 지급해 달라고 했어요. 당연히 저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쪽은 법원에 로비를 한다고 한 거였는데, 법원에서 나온 공문도 아니고, 검찰에서 나온 공문이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게이트 로펌에서 로비하겠다고 한 대상은 법원이니 그들의 말이 맞지 않는 것이긴 했다. 그렇다고 광야 로펌에서 로비 한 곳에서 발급한 것도 아니긴 하다.


"서류가 발급되니까 자기네들이 한 거라며 돈 달라는데,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네요. 사무실도 없는 그 로펌 측에서 본인 돈으로 미리 4억 동을 내고서 이걸 받았을 것 같지도 않고요. 그리고 이제 다 끝났는데, 왜 이리 질척거리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며칠 전 짱(Trang) 변호사가 거의 인질협상처럼 돈을 달라고 협박하던 일이 생각나서 더욱 질척거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죠. 저희도 아는 라인 통해서 어떤 경로로 이 공문이 발급된 건지 알아봤는데, 검찰 측이 돈을 받고 발급한 것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저와 저희 변호사들도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정의를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하는 검찰이 발급한 건가 싶었어요." 이 말을 건네며 그는 피식 웃었다. "아마 그런가 보네요. 그런 정의로운 공무원이 앉아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저희가 게이트 로펌에 돈을 주지 않아도 되는 게 맞는 거죠? 저희는 아무런 계약도 작성한 적이 없고, 이 공문을 받아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잖아요. 또 게이트 로펌은 판사에게 로비한다고 했는데, 공문은 엉뚱한 검찰에서 나오기도 했고요."

"그러니까요. 저희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계약이나 업무 요청이 없었다면 지급할 돈은 없는 게 맞죠. 안 주셔도 됩니다. 다만, 그 로펌이 사건을 방해하거나 해코지하진 않을지가 걱정되긴 하네요."

"그 로펌이 이 사건에서 우리를 방해할 만한 게 있을까요?"

"뭐 설마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만약에 하게 되면 회사를 상대로 사기 친 전 법률팀 직원들 찾아가서 우리가 대응하고 있는 걸 알려준다거나 정도는 할 수는 있겠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크게 타격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번 만나셔서 마무리는 원만하게 합의를 보시는 게 좋긴 하겠습니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네, 사건에서의 역할 분담이나 선도 확실히 그을 겸, 제가 다시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검찰에서 발행된 공문으로 내일 오전이면 집행기관에 있는 서류들은 다 검찰로 압류될 겁니다. 이제 돈은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 법으로 싸워서 돈을 찾아와야죠. 저희가 최근에는 총영사관 하고도 접촉하고 있어요. 지난번에 법인장님이 경찰 영사하고 연락해 보셨잖아요? 이번엔 총영사님하고 같이 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영사님께 이 사건 보고했고, 베트남 정부에 협조 공문을 본인 명의로 보내시겠다고 하셨어요." 백 변호사는 설명과 함께 영사관 측과 공동으로 작성 중이라는 협조 공문 초안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한숨 돌리겠네요. 총영사님까지 직접 나서주시면 너무 큰 도움이 되겠네요. 감사합니다." 이제 뭔가 조금 싸워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게이트 로펌의 짱(Trang) 변호사를 만났다. 로펌의 공유오피스는 호치민 2군에 위치한 카페거리에 있다. 처음 만날 때는 카페 안쪽으로 들어오라고 해서 찾기가 어려웠는데, 이제는 바로 카페 2층으로 올라가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실 밖에는 10명 정도 되는 동양 사람, 서양 사람들이 서로 다른 회사의 소속으로 서로 다른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 같아 보이기도 했다. 책상 하나가 회사 하나였다.


짱(Trang) 변호사는 본인들이 로비해서 검찰의 공문이 발급된 것이라 설명한다. 나는 회사 측에서는 그 공문을 발급받아 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고, 계약도 없는데 왜 이 일에 끼어들어 사건이 꼬이게 만들었냐고 반문했다. 또 게이트 로펌에서는 법원 측의 공문을 받겠다고 했는데, 왜 검찰에서 공문이 나왔냐고 재차 물었다. 그녀는 이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아마 그저 돈을 받기 위한 거짓말일 것이다.


나는 선을 그었다. “이 사건에서는 손을 떼십시오.” 이제 관계를 문서로 고정할 차례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회사를 도와주고 한 것은 너무 감사하고, 그 이유로 회사는 앞으로 1년간 게이트 로펌의 짱(Trang) 변호사를 자문 변호사로 계약하고 싶다고 말하며 자문 계약서를 전달했다. 이 계약서에 사인하면, 앞으로 1년간 우리 회사에 자문 업무를 할 수 있고, 자문 업무를 성실히 해주면 계속 연장할 수 있다고도 설명해 주었다.


다행히 짱(Trang) 변호사는 자문 계약서에 사인을 했고, 이 사건에서는 손 떼고, 만약 회사가 이 사건에서 본인의 도움이 필요하면 광야 로펌의 베트남 변호사와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이제 게이트 로펌은 완전히 손을 뗐다.


짱(Trang) 변호사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한국에서 관리 임원에게 연락이 왔다. 그 사기꾼 녀석들, 융(Dung)과 르엉(Luong)이 한국의 대표이사와 관리 임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베트남 법인의 법인장이 베트남 법을 심각하게 위반하고 본인들에게 성과급을 지급하지 않고 있는데, 아마 베트남 법인에선 한국 본사에 보고하지 않았을 것 같아 직접 메일을 보낸다고 하면서 첨부서류까지 붙여 발송했다고 한다.


"얘네들은 임 법인장이 한국에 보고 안 했기를 기대하고 이 이메일을 보낸 것 같네. 내가 살다가 이렇게 싹수없는 새끼들은 처음 본다. 그동안 어떻게 이런 애들하고 같이 일했어? 대표님도 그러시는데 얘네들 빨리 감방에 넣으라고 하셔. 일 빨리 마칠 수 있게 본사에서도 지원팀 하나 꾸려 보낼게."


전화를 끊고 나서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내가 이 사건의 초창기부터 본사와 연락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 말은 이들은 회사의 내부 직원과 연락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매니저나 직원들을 의심하던 마음이 조금 사그라든다. 앞으로는 조금 더 믿고 함께 일해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전에 사기꾼 녀석들에게 돈을 보내려고 뱅킹에 접속한 뒤에 비밀번호를 틀렸다는 말이 무엇이었는지 조금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다.


이제 이들은 그저 발악에 가까운 질척임으로 본사에 연락을 한 것일 테다. 그렇지, 비가 그치면 땅이 질척이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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