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이 미 투 더 문> 리뷰
<플라이 미 투 더 문> (2024. 그레그 벌랜티)은 1960년대 미소간의 우주 패권 경쟁 시대에 불거진 음모론을 소재로 진실과 거짓을 은유하는 두 남녀가 부지불식 스며들며 하나가 되는 사랑을 그린 로맨틱 코미디이다. 그러나 정작 영화가 담아내고 있는 중요한 주제는 진실과 거짓이라는 대립적 경계의 삭제이다. 이것이 로맨스인가 하면 철학이고 거대한 우주론인가 하면 사소한 사랑 이야기인 다층적 결이 <플라이 미 투 더 문>의 매력이다.
배경은 60년대 말, 닉슨 시대. 당시 정부에 냉소적이었던 대중의 관심을 얻기 위해 백악관은 비밀리에 회심의 작전을 모의한다. 막대한 예산과 인간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패색이 짙은 베트남전과 미소 우주 전쟁에서 소련에 우위권을 빼앗기고 수세에 몰린 미국의 중심 권력이 대중의 지지도를 회복하기 위해 ‘달착륙’이라는 거대 이벤트를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건 달착륙 자체가 아니라 정치적 우위권과 대중적 인기의 회복이었다. 일명 ‘Space Race’. 백악관은 NASA의 홍보를 위해 마케팅 귀재 켈리 존스(스칼렛 요한슨)를 고용하기로 한다. 어찌보면 대중에게 달을 파는 블랙코미디에서 마케팅과 광고업계의 천재 켈리를 찾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러나 야심차게 NASA 현장에 입장한 켈리에게 걸림돌이 있었으니 바로 아폴로 미션의 막대한 임무를 안고 있는 콜 데이비스(채닝 테이텀)이다. 어릴 적부터 생계형 사기가 익숙한데다 거짓을 진실처럼 포장해 대중의 호기심만 끌어들이면 되는 켈리와 과학적 정확성에 더해 인간적인 진실성까지 갖추고 있는 콜의 소소한 충돌이 영화의 맛을 돋운다.
아이러니한 것은 진실보다 거짓의 힘이 대중에게 더 강력하게 먹혀 들어간다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피 흘리며 죽어가는 베트남 전쟁이 있지만 한쪽에서는 대량 생산과 소비 문화가 급속도로 확장해가는 60년대 미국의 대중에게 켈리는 겔로그 시리얼과 오메가 시계 심지어 유명 속옷 광고에 우주인들을 등장시키며 대중의 관심을 NASA에 끌어 들이는데 성공한다. 과정이 결과보다 중요하다고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는 결과이다. 우주 개발 전쟁에 냉소적이었던 대중의 관심을 단박에 끌어올리고 막대한 국가 예산도 얻게 되는 켈리의 마케팅 전략의 성공에 콜도 그녀의 방식에 이끌린다. 아폴로 1호의 사고로 동료 우주인들을 불길 속에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콜의 죄책감도 이제 그만 벗어 내게 될 희망적 신호가 보인다. 그렇다고 진실의 판정패도 아니다. 영화가 짚어내는 것은 켈리 또한 콜의 인간적 온기와 진정성에 이끌리게 된다는 양면적 가치의 화해와 공존이다. 다소 신파적인 이 설정에서 모던 클래식의 감성을 한껏 풍기는 60년대 팝송과 스크린의 이미지는 돈과 속도가 숭상되는 현대 사회의 가치가 전부인가를 질문한다. 영화는 당신이 위만 올려다보는 사이 잊고 있었던 느슨한 향수의 시대로 시간을 잠시 되돌려본다.
또 한가지 영화의 맛을 더하는 것은 신출귀몰한 검은 고양이의 등장이다. 예측 불가능한 등장과 퇴장으로 텐션을 올리며 콜의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신념과 충돌하는 검은 고양이는 켈리의 은유일까? 아니면 켈리를 고용하고 조작극을 사주하지만 진실이 밝혀진 종국에는 사라지는 의문의 백악관 전령사 모 버커스(우디 해럴슨)의 또 다른 모습일까? 분명한 건 검은 고양이는 단순한 불청객 혹은 불운의 상징으로 소비되는 가벼운 조연은 아니라는 것이다. 갑자기 섬광같이 나타나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고 심지어 조작된 달착륙 영상이 송출되는 와중에 나타나 찰나적 위기와 긴장감을 만들어 내지만 그 혼란이 오히려 아폴로 착륙이 진실임을 증명하게 되는 역설을 완성하는 검은 고양이는 어쩌면 인간들 통제 너머에 있는 초자연적 우연 혹은 진실일지도 모른다. 모두들 잡아보려하나 잡히지 않는 미지의 존재. 아니면 통상 해피 엔딩인 로맨틱 코미디의 클리쉐가 그러하듯 다름과 충돌을 넘어 마침내 사랑이 얻어진다는 진부함을 덜어내는 영화적 트릭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이를 달나라로 데려다 주리라는 (fly me to the moon)낭만적 팝으로 화면을 여는 감독의 의중 또한 헤아려본다. <플라이 미 투 더 문>은 무용한 전쟁과 기계적 대량 문화에 익숙한 시대에 잠시나마 우리를 달나라로 데려다주는 영화적 미학을 로맨스를 빌어 예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반세기 전에 진짜 달에 찍힌 인간 발자욱의 과학도, 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다는 가짜 달의 낭만도 모두 인간이 만든 인간의 서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