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과 사회인의 경계에서
무슨 일 하세요?
학생이에요.
유학생이에요.
대학원생이에요.
누군가 나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보면 난 세 가지 중 하나로 답한다. 한국에서 질문을 받으면 유학생이라고 하고, 미국에서 질문을 받으면 대학원생이라고 한다. 택시 기사나 카페 직원 등 가볍게 질문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학생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대학원생이라고 하면 상대가 측은하게 바라보는 경험을 여러 번 하다 보니 그냥 유학생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나는 학생 신분으로 보낼 수 있는 최장기간을 보내고 있다. 학사 4년, 석사 2년, 박사 4년까지 마쳤으며 앞으로 2-3년 정도를 더 학생으로 있을 예정이다. 초중고까지 다 합친다면 인생 대부분을 학생 신분으로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20대에는 항상 대학에 있었다. 석사를 할 때까지만 해도 이러한 인생을 즐겼다. 정당하게 여유로울 수 있다고 할까. 나는 늘 학교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을 안 해도 백수는 아니라는 안정감이 있었다. 석사 때부터는 무려 돈을 받는 학생이었으니까 더 좋았다. '나는 아직 학생이니까, 미래를 준비하는 거야'라는 핑계로 마음껏 남는 시간을 즐겼다. 박사를 하면서 비로소 학생으로서의 정체성에 약간의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나는 학생이 맞는가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니 학생이긴 하다. 학생 비자로 미국에 와있으니 유학생도 맞긴 하다. 학생이라기엔 나이가 좀 많다. 서른이 넘었으니. 학생이라기엔 돈도 벌고 있다. 파트타임이긴 해도 나는 국제기구의 직원이고, 여러 팀에 속해있다. 학생이라기엔 책임이 많다. 일을 잘 못하면 잘릴 수도 있고, 나의 교수님은 늘 내 연구는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고 잘못되면 내가 무능한 것이라고 한다. 그저 학생이라고 나를 정의하기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때보다 인생의 난이도가 너무 높아진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나는 사회인인가
돈을 벌고 책임이 있고 나이가 많기 때문에 학생이 아닌가. 어찌 되었든 회사에 다니고 있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니 사회인이긴 하다. 같은 팀에 있는 팀원들은 모두 정직원이고 국제기구가 그들의 직장이다. 하지만 사회인이라기엔 돈을 너무 적게 번다. 주 20시간만 일할 수 있기 때문에 만족할 만큼의 수입이 없다. 사회인이라기엔 나의 비자가 학생비자이다. 공식적으로 학생이 나의 본분이고 일은 오로지 나의 학위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사회인이라기엔 부모님께 경제적인 보답을 하지도 못 한다. 월세와 생활비를 지출하고 나면 남는 것이 거의 없다. 사회인이라기엔 사회 공동체를 위해 쓰이지 못한다. 사회생활 경험도 적고 공부만 해왔기 때문에, 실무를 제대로 할 줄 모른다. 아직 학위를 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분야에 있어서도 전문가가 아니다. 사회인이라기엔 공부도 너무 많이 한다. 사회인들은 더 생산적인 일을 하느라 이렇게까지 공부할 시간이 없을 텐데.
대학원생은 오직 대학원생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취업은 하지 않았지만 일은 하고 있고, 돈은 벌고 있지만 아직 학생이다. 공부를 하고 있지만 무언가를 생산해내야 한다. 학생도 사회인도 아니고 그저 대학원생일 뿐이다. 연구에 아주 열정적이지 않은 (나 같은) 대학원생들은 종종 회의감에 빠지기도 한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빠르게 나오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이렇다 할 성취 없이 오랜 시간을 연구에 투자해야 하기 때문에, 빛없는 동굴 속을 헤매는 느낌과 함께 우울에 빠지기도 한다.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나의 처지를 비관한 적도 있다. 친구들은 다 직장 생활하면서 돈도 모으고 결혼도 하고 집도 사고 주말에는 취미 생활도 하는데. 나는 왜 주중이고 주말이고 늘 일만 하면서 돈도 없지. 그들은 경력이 쌓이면서 서서히 전문가가 되어가는데, 나는 지금 당장 사회에 나가면 할 수 있는 일이 있나.
하지만 사실 애매하기 때문에, 정확히 학생도 사회인도 아니기 때문에 좋은 점이 분명히 있다. 나는 아직 어느 정도는 학생이니까, 진로에 대해 더 깊은 고민을 해도 된다. 아직 취업을 하지 않았으니까 조금 더 많은 분야에 대해 알아봐도 된다 (물론 내 전공과 능력치와 관련이 되어야겠지만). 진로 고민을 해도 되는 "학생"이라는 신분의 특권을 아직은 조금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는 사회인이니까, 전문 지식이 조금은 있으니까, 사회 초년생들 보다는 약간 앞서서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 나는 지난 십 년 간 직장 경력이 없지만 공백 또한 없다. 늘 어딘가 소속되어 있었고, 이는 내 학위들이 증명해준다. 물론 이는 내가 박사를 무사히 졸업한다는 가정 하에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오랜 기간 학교에서 공부한 것을 업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투자로 인정해주는 경우도 많다.
추가적으로 좋은 점들도 있다. 나름 돈을 벌고 먹고살면서도 시간을 비교적 유연하게 쓸 수 있다는 것. 매일 8시간씩 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24시간 일하고 내일부터 3일을 쉬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 병원을 가거나 은행을 가는 데에도 굳이 점심시간을 이용하지 않아도 된다. 자체적으로 휴가를 내고 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다. 물론 파트타임으로 일을 시작하면서는 회사에 허가를 받아야 휴가를 갈 수 있게 되었지만, 대학원생들은 내가 쉬고 싶을 때 쉬어도 된다 (물론 내 전공 특성상 그런 거지 실험실에 출퇴근하는 대학원생들은 이렇지 않다). 학생증이 있기 때문에 여러 문화생활을 하면서 할인 혜택을 받는 것도 추가 장점이다.
현재의 나는 직장인이 부럽다. 무슨 일 하냐고 물어보면 나 교사다, 변호사다, 회사에 다닌다 등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몇몇 직장인들은 나를 부러워한다. 아직도 너는 꿈을 찾고 있구나. 아직도 너는 도전을 하고 있구나. 아직도 너는 가능성이 있구나. 막상 나는 기대했던 만큼 연구가 즐겁지도 않고, 학계에 남고 싶지도 않기 때문에 이게 꿈을 좇는 것이 맞을까 혼란스럽기만 하다. 무엇을 위한 도전인지도 잘 모르겠다. 끊임없이 진로 고민만 하고 있다. 그만두기 위해서는 '싫어서'가 아닌 '다른 것이 좋아서'라는 이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멈추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늘 완전한 만족 없이 무언가를 갈망하고 또 추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혼란 그 자체이지만, 졸업 후 어딘가에 자리 잡고 돌아보면 나의 대학원생 시절도 무언가를 위해 보낸 소중한 시기였다고 생각하게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