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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책부림

끝나지 않는 전쟁

by 모모제인
아빠가 누나 책 찢어버렸어..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니 둘째가 쭈뼛거리며 내게 재활용수거함을 열어 보여준다. 거기엔 처참한 형태로 종이 조각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내가 일 다녀온 사이에 아빠의 책부림(?)이 있었던 모양이다. 방을 들여다보니 당사자인 아이와 아빠는 쿨쿨 자고 있다. 대신 둘째와 막내가 안절부절못하며 휴지조각이 된 책장들 사이에서 온전한 페이지들을 찾아내 순서를 맞추고 있다. 이 상황이 왜 이리 웃기는지, 난 그저 웃음만 했다.




사교육 없이 엄마표 학습을 한지 어느새 30개월. 아빠가 저러는 것도 이젠 놀랍지 않다. 학원을 끊은 순간부터 매일이 전쟁이니까. 나도 책만 안 찢었을 뿐 회유, 협박 등 안 해본 게 없다. 하나라도 더 시키려는 부모와 저항하는 아이들 간에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휘몰아친다.


엄마, 나 학원 보내주면 안 돼?


나도, 아이들도, 학원의 유혹에 매일 흔들린다. 아이들도 학원 좀 보내달라고 난리다. 이유는 뻔하다. 거기선 선생님의 시선을 피해 다수의 아이들 사이에 적당히 숨을 수 있으니까.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공부에 대한 "자유의지"가 있는 아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채찍 때문이든, 보상 때문이든, 저항하기를 포기했든, 이유가 뭐가 됐든 말이다.

"식욕은 식사와 함께 온다"는 말처럼, 의무적으로 어떤 일을 하다 보면 그 일이 좋아질 수 있습니다. 의무를 통해 훈련을 하고 동시에 행복과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 왜 엄하게 가르치지 않는가, 중에


3년 전엔 나도 여느 맞벌이 부부와 같았다. 학원에 가는 게 가장 효율적이라 생각했고 학원 뺑뺑이를 했고, 매월 학원비에 허덕였다. 지금 생각하면 아이의 실력보다는 내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점점 그 편리한 시스템에 의지하게 되었다. 아이 입장에서도 내 입장에서도 학원의 시스템은 서로의 감정을 소모하지 않으면서 효율적으로 시간의 "양"을 채울 수 있는 효율적인 도구였다. 어느 날, 되돌릴 수 없는 아이의 시간을 후회하게 된 결정적 계기를 맞았고 이때부터 전적으로 아이의 실력을 눈으로 확인하며, 학원은 아이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부분을 보충하기 위한 도구로만 쓰고 있다.


그게 진짜 올바른 방법일까요


누군가는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이 방식이 맞는 걸까, 난 매일매일 흔들린다. 사실 너무 두렵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 하지만 확신은 있다. 아이를 성적으로 우등생을 만들 자신은 없지만 공부가 뭔지 알게 할 자신은 있다. 학교 다닐 때 공부가 공부의 전부가 아니며, 인생 사는 것 자체가 공부고 죽을 때까지 하는 게 공부라는 것. 수능이 끝나면 공부가 끝나는 게 아니고 사업을 하든 회사에 들어가든 돈을 쓰든 모으든 모든 게 다 배움이라는 것을.


모름지기 세상의 이치는,

아니까 하는 게 아니라, 모르니까 하는 거고, 하니까 아는 거라는 것을.




중딩이 된 첫째가 1학년 자율학기 선택과목을 골라왔는데 세상에.. 중요과목 주제들은 모두 제쳐두고, 바느질, 상상디자인, 그림책 제작, 이런 걸 하겠단 게 아닌가.. 목구멍까지 말이 넘어오려다 걱정스러운 티를 겨우겨우 누르고 있었다.

영어가 좀 필요할 것 같더라고


신청 당일, 나갔다 돌아오니 아이가 하는 말이다. 영어가 좀 필요할 것 같아서 영어과목을 골랐다는 거다. 진짜 세상 놀라 자빠질 뻔했다!!! 이런 날이 오는구나!!!!!!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륵 흘렀다.


아이 휴대폰에 내 번호는 "공부 많이 시키는 엄마"로 저장되어 있다. 엄마 때문에 마지못해 하고 있는 공부인 줄 알았는데 스스로 영어를, 그것도 자기가 제일 싫어하고 못하는 영어를 골랐다는 게 너무 놀라웠다. 좋아하는 거 하게 해주는게 맞지 않아? 라고 한다면, 하기 싫지만 해내는 과정을 배우는게 진짜 공부라고 대답하겠다.


학급임원 하면 오만 원 줄게


임원 해서 힘든 일은 없지만 친구들 앞에서 발표하는 게 싫어서 하기 싫다는 둘째. 나는 아들이 젤루 좋아하는 용돈으로 살살 꼬셨다. 그리고 주말 내내 깨알 같이 임원을 하면 좋은 점을 세뇌시켰다. 그리고 임원선거가 있던 월요일. 으레 껏 안 됐겠거니, 출마는 했으니 잘했어! 하며 준비해 둔 아이스크림을 슬쩍 쥐어줬다. 그러고 밤에 잠자리에 들려는데, 엄마, 나 사실 부회장 됐어! 한다. 눕다 말고 벌떡 일어나 찐득하게 껴안고 마구마구 뽀뽀를 해줬다. 아이도 머쓱한 듯 실실 웃는다. 오늘은 학급임원 리더십 교육이 있다고 한다. 그런 걸 왜 하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리지만 불편함 속에서 아이는 분명 성장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깟 오만 원에 넘어갔지만 그건 그저 물가에 데려다 놓으려는 엄마의 노력이었을 뿐, 그걸 이뤄낸 건 아이 자신이라는 걸 안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행복한 에피소드를 쓰긴 했지만, 머리채 쥐어뜯고 서로 윽박지르는 날이 열 배는 더 많다. 아빠의 책부림 때문에 딸이 행여나 상처받지 않았을까 염려해 물었더니 아이가 태연히 말한다.


뭐가? 난 괜찮은데?
책 없으면 공부 안 해서 더 좋은데?
그보다 엄마가 오늘 새 문제집 또 사서
그게 더 상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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