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이어서 쓰겠습니까?
"글쓰기" 버튼을 누르자 느닷없이 팝업이 뜬다.
임시저장된 글이 있습니다. 계속 이어서 쓰겠습니까?
(임시저장된 시간 : 2024년 11월 18일 06:54)
뭐지? 심지어 작년?
그렇다. 글을 놓은지 이리 오래인 것이다.
살아가느라, 아이 키우느라, 일하느라, 밥 차리느라, 눈곱 떼느라, 사소한 일 투성인데 맘 먹기는 거창하다. 꾸준히 글을 쓰던 시절은 사람들을 싹쓸어간 텅빈 플랫폼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이어서 쓰겠습니까? --- 예
"제목 : 25년 12월 26의 모모에게"
타임머신 같은 이 제목은 뭐지? 노트는 텅 비어있다.
2024년 11월 18일의 나는 미래의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던 걸까.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캘린더에 그득그득한 오늘의 일정조차 휘발된지 오랜, 과거의 메모인 것을.
내 꿈은 "프리랜서"였다.
여행을 가면 '가이드 어떨까', 귀여운 일러스트를 보면 '오늘부터 캐릭터 디자이너 할꺼야', 선생님이랑 친해지면 '나도 선생님 하고 싶어요', 이런 식이었다. 행동보다는 번개같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현실을 깨닫고 금방 포기하곤 했다. 그런 성향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나는 종종 허무맹랑한 대담함을 보이기도 했는데, 일테면 이런 식이었다.
나중에 한국 뜰꺼니까 찾지마. (해외여행은 커녕 집순이입니다)
이민 가서 외국인 남편이랑 딩크족 할꺼야. (서울 토박이 남편과 아이 셋이랑 살아요)
사업은 취미로 3개쯤 번갈아가면서 할거고 (생각으로만 10개쯤 하고 있습니다)
아빠 같은 회사원은 절대 안해. (흔한 이직 한번 없이 15년 다녔어요)
번개같은 상상력과 겁없는 공상력에도 불구하고 내 일상은 지루하리만큼 일정했고 무자비하게 예측 가능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3에 인생 최고의 일탈이라고 할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머리 속 공상 100가지 중 하나가 최초로 현실이 된 날.
쌤 : 모모야, 지금 네 점수면 안정적으로 OO대가 딱이야.. 자.. 여기 원서 있으니까 내일까지 작성해와라.
나 : 네.. (선생님 KPI*가 OO대 진학율 90% 달성인거 다 알아요. 전 미지의 세계를 탐험할 거예요)
KPI*(Key Performance Indicator) : 조직이나 개인의 목표달성 성과 지표
그렇게 나는 이중원서를 제출했고, 2003년 '서울 지방대'로 상경했다. 해외로 뜨지 못한 이유는 자명했다. 내 피부는 쿨톤이니까 금발은 안 어울려, 서울 차도녀가 좋겠어. (이 결정은 인생 두번째 일탈 '서울 토박이 남자와 결혼하기'로 이어졌다). 그 '서울 지방대'는 입학후 얼마되지 않아 삼성과 협약하여 명문대 계열로 들어섰고, 점수에 맞춰 선택한 컴공과는 2000년대 초반 IT붐으로 떡상했다. 입사 당시 주인없이 채권단 법정관리로 넘어갈뻔한 회사는 대기업이 인수하여 반도체 열풍의 주역이 되었다. (매해 이례적인 성과급으로 대서특필 중이다.) 40대 전까지는 8할이 운빨이었다. 그렇게 진득하게 (관두지 못하고), 진득하게 (첫 직장에서 15년을) 머물렀다. 공상가 기질은 못 속인다고, 그 안에서도 대담한 상상력은 계속되었다. 해외사업부로 가겠다느니, 사외 프로젝트를 하겠다느니. 몸부림 쳐도 회사는 공상으로 굴러가는 곳이 아니었다. 회사는 나랑 안 맞아, 하면서도 '선택하지 않는' 선택으로 이삽십대가 훌쩍 지났다. 다음주에 결혼하는 지인한테 결혼축하한다고 했더니, 첫사랑이랑 연애만 8년 한거라 아쉽단다. 나의 회사생활도 다르지 않았다.
나이 마흔에 회사를 때려친 순간부터,
회사 이름 빼고는 나를 소개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았다.
공상가 여고생은 나이 마흔에 다시 신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