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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 꿀꺽한 프리랜서

나이마흔, 운동으로 벌어먹기

by 모모제인

A : 월 200 돼?

B : 아니, 넌?

A : 나도 마찬가지야. 아침저녁으로 매일 수업 뛰는데 이게 말이 되냐? 이 직업, 진짜 너무한 거 같애.




마흔이 되니 뭐든 깜빡깜빡이다. 특히 사람이름.

요가선생님이 수업 중에 내 이름을 불러주면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나도 이제 강사니깐, 회원님들이랑 라포를 형성해 보자고! (회원유치에 효과가 좋거든요.) 누군가 동작을 틀리게 하면 OO 씨, 손끝을 더 뻗어보세요, 라든지, XX 씨, 동작이 많이 늘었네요, 소통하면서, 가벼운 담소도 나누면서, 점점 내 수업에 빠져들고 말 꺼야, 최면을 걸면서. 한 타임이 두 타임이 되고, 두 타임은 세 타임이 되고. 야호! 생각만 해도 신난다. 월 200은 금방이지. 헤헤.


드디어 개강 첫날, 제가 얼른 성함 외울게요, 하며 출석을 열심히 부르고, 이름 옆엔 특징을 적어가며 얼굴과 이름을 연결했다. 그렇게 얼추 다 외웠다 싶던 어느 날, 우려하던 일이 생겼다. '새로운' 이름, '새로운' 얼굴과 마주한 '새로운' 한 달의 시작이여. 당황스러운 일은 또 있었다. OO님 발끝 더 당겨보세요, 했는데 수업이 끝나고 XX님이 오셔서 아까, 그렇게 해보니까 너무 시원했어요, 하는 등의 일을 겪고 생각했다. 그래, 내일 할 일도 까먹는 판에 이름 외우는 건 사치야.


그렇게 이름 외우기는 포기하고 지낸 지 몇 달,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회원분이 강의실 문을 열면 저분은 김 OO, 어, 그래, 저 두 분은 엄마와 딸이시지? 어라, 이번 달은 XX님이 등록을 안 하셨네, 하며 지나간 이름마저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기적은 별게 아니었다. 기적은 돈에 따라왔다. 그곳에 출강하고부터 월 수입의 앞자리가 바뀌었다. 그래봤자 숫자 하나일 뿐인데 수업하는 내내 텐션은 하늘을 찌르고, 한 분 한 분에 애정이 샘솟았다. 저랑 3개월만 같이 운동하시면 몸짱 문제없죠, (아니, 6개월이라고 할걸 그랬나?) 하면서 장기고객유치를 하질 않나. 자고로 일이란 돈보단 자아실현이지, 아무리 돈 많이 줘도 인생 갈아 넣어야 되면 그게 무슨 의미야, 했던 내가 마흔에야 현실을 깨달은 걸까. 자아실현이고 나발이고 이번 달부터 애 학원 하나 더 보낼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분들인데, 이름 까짓꺼, 백 명이고 천명이고 외워야지, 암, 그렇고말고.




직장인일 때 나는 돈은 별로 안 중요하다고 믿고 싶었던 것 같다. 흥미도 적성도 없는 일 하면서 돈 때문에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더 서글펐다. 지금은 대놓고 돈돈 거린다. 시급 5천 원 올려주면 충성을 맹세하고, 시급 만원 더 받으면 꺼져가는 기억력도 활활 타오른다. 사내정치가 싫어서 나왔는데 회원님들께는 자본주의 미소, 관리팀장에게는 아부도 밥먹듯이 한다. 돈 때문에 하는 운동이 인생이 되고 그러다 보니 돈이 되고, 그걸 알고 나니 더 많이 벌고 싶다.


모시 히로시는 '작가의 수지'라는 책에 이렇게 썼다.

'좋아하니까 한다는 사람은 열정이 식었을 때 슬럼프에 빠진다. 자랑할만한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비판과 비난을 받으면 의욕을 잃는다.'


나는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돈이 되니까 한다는 사람은 슬럼프에 빠질 수 없다.'


요가가 좋아서 요가강사가 되었다. 좋아서 했는데 일이 되니 지치는 날도 생겼다. 그런데 돈을 버니까 슬럼프에 빠질 일이 없다. 휴가도 자발적으로 안(못?) 가고, 공휴일 많은 달엔 슬프기까지 하다. 이래 봬도 예전에 잘 나가던 사람이었어요, 허세를 부려보고, 좋아하는 일 하면서 돈도 번다며 자존감을 부여잡다가, 통장 잔고를 보면서 과거의 허세를 다시 꺼내보게 되는 일상을 산다. 변하지 않는 사실은 그 때나 지금이나 돈을 벌려고 한 일이고, 일이니까 그냥 한 거다. 의미부여는 그다음이다. 그렇게 그냥 하다 보니까 전문가가 되고 돈이 벌리고, 돈 때문에 했던 일이 인생이 되고 또 그게 돈을 벌어다줬다. 돈과 일을 동떨어지게 보고 싶었는데 아니었다. 일과 인생을 동떨어지게 보고 싶었는데 아니었다. 내 운동과 다른 사람 운동시켜 주는 일이 다른 게 아니다. 일이 나고, 인생이 일이고, 일이 돈이어서 뭐가 뭔지 구별되지 않는다.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요.


100억,

이런 숫자는 유산균 말고

이제 내 통장에서 보고 싶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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