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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킴 Apr 15. 2021

그러나 사지 않는다

뉴질랜드 사람들이 소비하는 법



그러나 사지 않는다


매년 의무적으로 받는 자동차 점검을 위해 자동차 정비소에 갔다. 1시간 정도 소요 된다고 하기에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려 어슬렁거렸다. 조금 걷다 보니, 구세군(Salvation Army)에서 운영하는 중고 가게가 눈에 보였다. 마침 바지가 필요한 참이기도 하고 시간 보내기에 좋겠다 싶어 가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필요했던 바지 세 벌,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조끼 두 벌, 셔츠 두 벌과 머플러 모두 여덟 개의 제품을 샀다. 가격을 모두 더해보니 60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5만원 정도이다. 이곳은 옷 값이 비싼 편이니, 60불이면 정말 횡재한 거다. 


한 벌 옷 만으로 살 수 있을 만큼 단단한 사람이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니, 부득불 옷을 사야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렇다고 불필요하게 많은 옷을 많은 돈을 들여 사기에는 주머니 사정이 허락치도 않거니와, 또 그것은 가능하면 심플하게 살고자 하는 내 인생 방침과도 어긋난다. 그러니 질 좋은 중고 옷을 몇 벌 사고 나면, 나의 필요를 충족시키고도 새로운 쓰레기를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에 정신적으로 안도한다. 


내가 새로이 그릇을 사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내 부엌 살림 중 그릇들은 모두 누군가가 쓰다가 내게 준 것들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 봤던 7~80년대 제품 같은 접시들도 있다. 당연히 제대로 된 세트는 없고, 다 제 각각이다. 심지어는 이가 빠진 컵과 접시도 버리지 않고 사용한다. 여기 중고제품 가게에 가면 그리 비싸지 않게 살 수 있다.


그러나, 사지 않는다. 


지금 쓰고 있는 그릇들이 미적인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유행에 뒤떨어졌을 망정, 음식을 담고 나르는 본연의 기능을 충분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쓰고 있는 이것들도 중고 제품 가게에 진열이 되면 누군가에게는 쓰임새 있는 물건이 될 것이다. 

 

내가 들른 중고품 가게





그러니 중고를 산다


뉴질랜드는 중고의 나라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중고 제품들이 활발히 거래된다. 크게는 가구에서부터 시작해서 전기 가전 제품, 부엌 살림, 책, 의류, 커튼, 심지어 속옷 등 가짓수도 다양하다. 그래서 중고 가게도 어디에서나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온라인 중고 사이트부터 시작해서 오프라인 가게들, 선데이 마켓 같은 벼룩 시장 그리고 개인이 하는 개러지 세일. 


생산 제조업이 없는 나라여서 거의 모든 공산품이 수입품이다보니, 새 물건들은 워낙 비싸다. 중고품 구입은 이 사람들의 몸에 밴 습관 같은 것일 것이다. 


뉴질랜드의 물건 값이 비싼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비싼 인건비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올해 4월부터 뉴질랜드의 최저 임금이 시간당 20불로 올랐다. 현재 집권당인 노동당의 오래 전 공약이었고, 이제 그 공약이 실현된 셈이다. 오른 인건비만큼 슈퍼마켓의 모든 제품의 가격이 더불어 조금씩 올랐다. 사람의 손길이 한번 스칠 때마다 가격은 껑충 뛴다. 물건 값이 비싸니 당연히 아껴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만큼 물건 값이 올라가는 것이니, 때로는 비싼 물건 값들이 꼭 싫은 것만은 아니다. 내가 일터에서 받는 인간적인 최저임금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불평할 일만은 아닌 것이 된다. 이곳에서는 사람이 존중받는 만큼, 어떤 물건이든 귀히 여겨진다. 멀쩡한 물건도 유행이 지나면 버려 버리는 요즘의 흐름과는 사뭇 다르다. 여기서 물건들은 유행과 트렌드로 평가되기 보다는 그 고유의 기능으로 평가된다. 무엇이든 제 역할을 해내고 있기만 하면, 그 물건들은 누군가의 손에서 유용하게 쓰여진다.


중고품 가게의 가구와 신발


중고 제품의 긴 생명력이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는 문화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때마다 그것들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평안해진다. 


때로 내가 원하는 물건을 찾기 위해 여기 저기 돌아다니고 또 때로는 오래 기다려야 하기도 하지만, 중고품들이 주는 정신적 위안은 내가 겪는 그런 불편함을 넘어서고도 남는다. 혹여 싸고 편리한 물건과 서비스 뒤에 있을 지도 모르는 말도 안 되게 값싼 노동력에 대해 마음 아파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응당 지불해야 할 것들을 지불하고, 물건을 아껴 쓰고 다시 쓸 때 얻는 만족감은 값싸고 화려한 새 제품이 주는 편리함을 넘어서고도 남는다.  





비싸고 불편한 구두


중고 제품은 새 제품이 줄 수 없는 것들을 준다. 중고품을 사면서 아무도 유행이나 트렌드를 신경 쓰지 않는다. 게다가 정말 무언가가 ‘필요’할 때만 찾게 되는 것이 중고품이므로 굳이 ‘불필요’한 것들을 사지 않게 된다. 그러니 돈도 아낄 수 있고, 또한 무언가를 사는 행위에 따라오는 많은 스트레스를 줄여 주기도 한다. 


한국에서 일을 하는 동안 내 옷장과 신발장은 수많은 옷과 신발들로 넘쳐 났었다. 사람의 가치가 종종 그가 걸치고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로 평가되기도 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늘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신을까 고민했었다. 옷장이 넘쳐도 새 옷을 사야 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렸다. 유행이 지난 옷을 입는 것이 마치 내 자신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처럼 보여질까 저어했던 까닭이다. 쇼핑을 즐겨 하지 않는 나에게 그것은 꽤 고역이었다.


그것뿐이랴. 딱히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이 쌓여 갈때마다 나의 번뇌도 늘어갔다. 손질과 관리를 필요로 하는 그것들은 그냥 물건이 아니라 나의 공간을 차지하고 내 시간과 에너지를 잡아먹는 번뇌의 원천이기도 했다. 중고품은 마음과 시간과 돈을 들여야 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몇 년 전 추운 겨울이었다. 굽 높은 부츠를 신고 언덕배기에 위치한 집으로 올라가던 길이었다. 당시 운동을 하지 않다보니 숨이 턱밑까지 올라왔고, 높은 굽으로 인해 다리에 힘이 실리지 않아 걷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때 문득 한 생각이 뇌리를 쳤다. 


‘이렇게 걷기도 힘든 이 구두를 사기 위해 나는 시간에 쫓겨가며 일을 하고 있구나. 운동할 시간도 체력도 남기지 못한 채, 차고 넘치는 옷들을 소비하기 위한 돈벌이를 하고 있구나’ 


그 날 집에 온 나는 뭔가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 나의 삶의 양식을 돌아보게 되었다. 옷과 신발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껍데기를 마련하느라 바쁜 나머지 내용물을 만들어 낼 시간과 에너지조차 없는 나를 발견했다.





풍성한 삶을 담는 그릇


실용성과 미적 아름다움을 갖춘 그릇을 왜 샀겠는가? 그것은 필경 그 안에 맛있는 음식을 담아 가족과 친구들과 나누어 먹으며 삶을 풍성하게 가꾸려 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그릇을 살 돈을 버느라 바쁜 나머지 음식 만들 시간도 요리를 배울 시간도 없었다. 그 때 깨달았다. 나의 소비 패턴을 바꾸려면 삶의 양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돈도 잘 벌고 시간도 많다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쉽사리 주어지지 않는다. 


나는 자연스럽게 돈을 포기하고 시간을 버는 것을 선택했다. 한편 두려웠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심 반가웠다. 처음엔 서툴겠지만 ‘소유’가 아닌 ‘경험’으로 지어가는 행복으로 서서히 나아갈 수 있겠다 싶었다. 


뉴질랜드에서 뜻밖에 만난 중고품들은 나의 이 결심을 한층 진지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짝이 안 맞는 그릇을 사용하는 것이 궁상이 아니라 소박한 아름다움이 되기 위해서는 밥짓는 일을 일삼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음식을 정성을 들여 맛있게 만들고, 그 음식을 먹는 시간을 즐거운 경험으로 만들어 가는 일에 집중해야 함을 더불어 알게 되었다. 


또한, 중고 제품으로 가득한 집안 풍경이 단지 주머니 사정을 대변하는 것만이 아니기 위해서는 정리와 청소를 게을리해서는 안 되며, 집안 곳곳을 도란 도란 이야기 꽃과 사람들의 밝은 웃음 소리로 가득 채워야 함을 배우고 있다. 


‘왜 쓰레기들을 가져다 팔지?’ 처음 뉴질랜드에 도착 후 정착 자금을 아껴 볼 요량으로 중고품을 사러 돌아다니며 했던 생각이다. 어디를 가나 값싸고 좋은 물건들이 반짝거리는 한국에서 이제 막 온 사람이 할 법한 생각이다. 그러나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뉴질랜드 사람들의 중고 사랑은 나의 생활에도 스며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나의 라이프 스타일이 되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물건을 사야 할 일이 아주 많겠지만, 지금보다 나의 구매력이 좋아진다 하더라도 물건의 본래의 목적과 기능에 충실한 소비를 하고, 물건의 외양보다는 그 안에 담겨야 하는 것들에 더 열심을 내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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