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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떼뜨망 Oct 14. 2024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었을까?

여행고집 (프랑스 1): 꼬뜨 다쥬흐, 니스, 쥬엉 레 빵

이름과 아주 비슷한 느낌을 주는 실체들이 있다.

단단한 바닥 위에서 뛰거나 표면에 손을 대면 "땅"이라는 게 느껴지고, 흐드러진 깃털구름을 눈으로 좇으면 "sky"가 생각나는 것처럼.


쥬엉 레 빵 (Juan les Pins)의 해변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마치 E와 내가 500미터 정도 길이와 끝없는 너비를 가진 바다를 빌린 것 같았다.

E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사각사각한 촉감의 흰색 선드레스를, 나는 폴로 남방과 체육복 반바지를 훌렁훌렁 벗었다.


옅은 하늘색 지평선을 따라 한 걸음씩 걸어 들어갔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수면이 눈높이와 가까워져서, 명치까지 담그니 눈앞에서 파도들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 춤은 빛을 맞을 때마다 은색, 분홍색, 주황색, 에메랄드색으로 시시 때때 색을 바꿨다. 기계적이면서도 야릇하게 자연스러웠다. 표면을 깨트릴 장애물이 나의 첨벙거리는 팔다리를 제외하고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끊이지 않는 금속의 얇은 천처럼 보였다.


주위를 둘러싼 물의 몸에 비해 강하고 빠르게 밀려 들어오는 작은 물결들은 가끔 갑자기 차가워지거나 따뜻해지면서 물고기처럼 날 스쳤다. 삼 일 전에 구매한 검은색 비키니는 프랑스인 체형이 맞춰져 크기가 살짝 컸다. 간헐적으로 차가운 물살들이 속살까지 파고들었다. 가장 연약한 가슴과 사타구니의 피부를 스칠 때 팔과 목에 작은 소름이 오도도 돋았다.

머릿속에 "Body of water"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떠올랐다. 왜 그렇게 부르는지 드디어 알았다.


지중해 바다는 투명하고 색이 거의 초록색에 가까울 정도로 맑아서 아래로 물을 젓는 내 두 다리가 유령처럼 불투명하게 보였다. 앞으로 계속 나아가니 수면이 어두운 남색에 가까워졌다. 뒤돌아봤다. 흰색 모노키니 차림으로 해변에 누워 책을 읽는 E가 시선의 외곽에서 손톱만큼 작게 보였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어 닦았다. 눈구멍, 입, 땀구멍 사이로 짭짤한 염분이 스며들어 입은 바짝 말랐고 눈은 따끔거렸다.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물살을 발로 차서 하늘을 보고 누웠다. 눈을 따끔거리게 한 염분이 이번에는 나를 지탱한다. 근육의 긴장을 풀고 눈을 떴다. 태양은 공평하게도 항상 비추는 파도와 마찬가지로 강렬하게 나를 맞았다.

희멀건 하늘을 찢고 고개를 내민 태양과, 내 모든 구멍을 침투하려는 바다를 무시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여전히 영속적인 왕복운동 중인 물살들...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었을까?


한국에 돌아와서도 E와 자주 만난다. 그녀의 표면은 햇빛의 사랑을 받아 반짝반짝 빛난다. 누구든 넋을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사연 없는 가정 없고 아픔 없는 인간 있겠냐만, 잔정이 많은 그녀는 요즘 위태로워 보인다. 미친 듯이 파도치는 그녀 옆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위에서 배영하며 같이 햇살에 아파해주는 것밖에 없다.




내가 사랑해 본 적이 있을까?


맛있는 음식이나 조금이라도 내 취향으로 생긴 남배우한테도 남용했던 단어를 이제는 소중하게 아끼고 싶어졌다. 이게 성숙의 지표인 지 비겁의 증거인 지 헷갈린다.

때가 되면 알지 않을까 - 땅을 딛고 "이건 땅이야, " 쥬엉 레 빵에서 "이게 body of water이구나" 했던 것처럼, 언젠가는 누군가를 바라보며 "이건 사랑일 수밖에 없어" 생각하지 않을까?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어차피 실망으로 점철될, 결말이 아픔일 게 뻔한 사랑을 시작했을까?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있다면 물살을 멈출 수 있을까?

놓아야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걸 알면서도, 예뻤던 추억과 찬란한 가능성의 흔적 때문에 아픔을 놓지 못하는 E를 보며 나는 덜컥 겁이 났다.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안다. 사랑을 인위적으로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이별과 증오도, 성장과 극복도 찾아올 거라는 것을. 그리고 그때가 되면 다시 괴로워지고자 한들 예전의 아픔은 깨끗이 잊혀질 것을.


도쿄에서 구매한 인센스를 피우며 글을 쓰고 있다. 연기가 되게 예쁘다. 불투명한 회색 연기가 부드러운 곡선의 춤을 추며 옆으로 둥글게 돌다가도 결국은 위로, 위로 향한다. 손가락으로 흐름을 방해해도 소용없다.


만약 날 찾아오게 된다면, 나의 사랑은 자연스럽길 바란다. 

색이나 모양은 연속적으로 변할지라도, 본능적으로 같은 파도라는 게 느껴지길.


현지인 부부. 휴양과 일탈의 공간이 이들에게는 일상이다.
피자와 음악을 즐기던 친구들.
밝은 날 니스의 바다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 자갈의 해변이 인상적이다.
E와 즐긴 피크닉. 그녀가 사 준  로제 와인과 처음 먹어 본 블랙베리
니스의 밤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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