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품앗이
페이스북,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 미디어를 하다 보면 신기한 일들이 일어난다. 초등학교 때 이후로 일면식 없던 친구에게 친구 추가를 걸어 대화의 물꼬를 트기도 한다. 모르는 사람에게 무작정 메시지를 보내 연인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서로 친구추가만 되어 있었지만, 메시지를 보내 친해지는 계기가 된다.
핸드폰을 하다 보면 내가 핸드폰을 하는 건지, 핸드폰이 나를 하는 건지 헷갈릴 때가 없지 않아 있다. 누군가를 기다릴 때, 대화를 할 때, 할 말이 없을 때 핸드폰을 꺼낸다. 대화를 나누지 않고 핸드폰을 켜 소셜 미디어를 확인한다. 그곳에 중요한 내용은 있지 않다. 친구가 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들. 내용과 사진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인생샷을 올린 뒤, 상관없는 내용을 올리는 글. 공허함이 있는 곳에 공허함을 가진 체 우리는 소셜 미디어에 접속한다.
핸드폰을 이용해야 하는데, 온종일 핸드폰을 보기 위해 삶을 살아가는 역설적 삶을 지낸다. 그렇다고 부정적인 면만 있는 건 아니다. 잊고 있던 주위 사람들과 연락을 할 수 있게 해준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글을 공유해 공론화시키고,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다. 마케팅에도 효과적이다. 물론, 모두가 일인 미디어가 되기 때문에 정보의 공신력이 없어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느끼기에는 소셜 미디어는 온통 공허함으로 가득 찬 곳 같다. 진실한 글로 표현의 자유를 서핑하고 있는 소수의 이들도 있지만, 문자 그대로 소수일 뿐이다. 대부분은 아무 생각 없이 올리거나, 자랑하기 위해서, 외롭고 공허해서 활동하는 듯하다.
나도 때때로 책을 들고 가지 못 한 경우에는 소셜 미디어를 하며 시간을 보내곤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기 전에 정기적으로 확인한다. 나에게 소셜 미디어는 마치 신문과 같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대화의 물꼬를 틀게 해주고, 정보를 업데이트해주는 목적형 소셜미디어라 할 수 있다.
과거에 소셜 미디어가 활성화되기 전에는 직접 연락했고, 소식을 주고받았다. 무작정 친구네 집에 전화를 걸어 친구가 집에 있냐고 물어 봤다. 친구네 집 문을 두드려 친구의 위치를 묻고는 했다. 친구의 부모님께서는 곧 돌아올 것이니 잠시 쉬다가 가라고 하셨다. 동네 놀이터나 학교 운동장에 가서 친구가 놀고 있나 무작정 나가곤 했다. 그곳에서 쭈뼛쭈뼛 있다가 서로의 어색함을 깨고 같이 놀아 친구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서로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공감하며 위로했고 꿈을 꿨다. 지금은 성인이 되니 서로의 삶이 너무나도 치열한 것일까. 사회에 만연하는 불신과 범죄율 때문에 서로 과도한 경계가 형성된 것일까. 이런 일은 이제 일어나지 않는다. 나에게 소셜 미디어가 과거의 놀이터이자, 친구에게 전화하는 인적교류 일부가 되었다.
나에게는 소셜 미디어에 존재하는 좋아요, 하트를 누르는 데 어떠한 원칙이 있다. 나와 안면이 있는 사람들의 글에는 내가 동의하지 못할 내용이 있지 않은 이상은 원칙적으로 눌러 준다. 동의하지 않는다면 누르지 않는다. 내가 모르는 이, 예컨대 신문사, 연예인, NGO의 글과 사진들은 내가 동의하거나 마음에 들 때 누른다.
나는 대화를 나눌 때 누군가가 핸드폰을 하는 것을 무진장 싫어한다. 중요한 연락 때문에 메일을 보거나 문자, 전화를 받음은 이해하지만 그런 경우는 서로 양해를 구한다. 하지만 소셜 미디어를 할 때는 서로 양해를 구하지 않는다. 대화의 적막이 흐를 때, 어색할 때 우리는 서로 양해를 구하지도 않은 체, 누군가가 먼저 핸드폰을 들기 시작하면 상대방도 이에 응한다. 심지어 핸드폰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어서 진동이 울리기만 하면 바로 확인하는 모습은 할리갈리를 하는 모습 같다.
이러니 대화와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벼워지지 않나 싶다. 물리적으로는 상대방과 같이 있지만, 나는 동시에 수많은 이들과 같이 있게 된다. 본연에 집중하지 못한다. 정말 중요하고 급한 연락이 아니라면 핸드폰을 하는 행위는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듯하다.
주제가 많이 셌다. 대화의 주제로 돌아오자. 한 번은 내 옆에 친구가 소셜 미디어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사실은 친구를 볼 때마다 보는 모습이지만, 구체적으로 본 적은 처음이었다. 소셜 미디어가 공개적인 곳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사생활 부분도 있는 복합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친구는 처음 보는 글과 사진인데도 엄청난 속도로 스크롤을 내리며 좋아요를 누르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좋아요를 누르는 기준이 뭐야?”
친구는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답했다.
“없어. 그냥 누르고 싶으면 누르는 거지.”
한 방 먹었다. 맞는 말 아닌가. 누르고 싶으면 누르는 거지. 자신의 자유를 향유하고 책임 또한 지겠다는데 무엇이 문제가 되랴. 다만, 상대방이 게시한 글은 읽지 않는 게 마음에 걸려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래도 올린 내용은 읽고 좋아요를 눌러야 하지 않을까?”
친구는 조소를 띄며 답했다.
“봤어.”
놀랍지 않은가. 이 정도 속독 능력이면 고시도 합격할 능력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빠른 시간 내에 핵심 문장을 파악해 읽고 내용을 요약하는 내용은 현대인이 가진 능력일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자극적인 문장에 반응하고, 상대방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렇지 말이다. 오죽하면 소셜 네트워크의 약자인 SN을 선동과 날조라 하지 않는가.
소셜 미디어에서 일어나는 부정확한 정보와 폭넓은 지식을 위해서는 필히 반대 의견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 단순히 정보 하나를 절대적 진리인 마냥 인정해버리면 그야말로 프로파간다의 완벽한 희생양이며, 상대방은 항상 옳고 착할 것이라는 성선설에 기반을 둔 아이러니임이 분명하다.
시대 불문하고 정보의 독점은 당시의 권력에 큰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하다. 정보를 얻지 못하는 이들은 자신의 무지를 대대손손 물려줬으며, 시시포스의 운명과 같았다. 정보를 찾기 가장 쉬운 시대에 사는 우리가, 마치 권력층의 정보 독점화 시대에 사는 것 마냥,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지향한다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어떻게 사용하냐에 따라 도구의 가치는 바뀐다. 칼은 사람에게 사용하면 무기이지만, 음식에 사용하면 그렇지 않다. 펜을 독재자에게 사용하면 진실이지만, 어용(御用)에 이용하면 거짓일 뿐이다. 소셜미디어도 마찬가지이다. 능동적이고 비판적 의식을 갖고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칼이 되어 날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