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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요한 Jul 27. 2021

턱끈펭귄의 무리생활

턱끈펭귄의 무리생활          


 턱끈 펭귄이 자립하고 나면 먹이를 찾으러 홀로 나아가야 한다. 역풍에 얼음장막이라는 환경, 처음으로 수영을 배우며 모든 걸 홀로 헤쳐나아가야 하는 상황을 마주한다. 그러다 얼룩무늬물범을 만나 잡아 먹힌다. 피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켜보던 나머지 펭귄들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먼저 나간 펭귄의 희생으로 모험을 이어간다.


 님비현상(Not In My BackYard)과 핌비현상(Please In My Front Yard)이 있다. 님비현상은 위험시설이나 혐오시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들어서는 것을 반대함을 말한다. 반대로 핌비현상은 금전적 이익이 예상되는 시설을 요구함을 말한다.


 한 기사를 봤다. 특수학교를 설립하는데 이를 혐오시설로 받아 들여 지역주민들이 반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착잡했다.


 장애인들이 사회적 약자이기에 경제적, 사회적으로 힘이 없어 영향력이 없음은 분명하다. 신체가 불편하기 때문에 대규모 집회를 피력하기에도 제약이 많이 따른다. 철저히 소외되는 사회에 그들은 살고 있다. 우리야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민원을 넣고, 의원과 관계자를 만나고, 시위를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당장 길거리에 나가 마주하는 방지턱과 계단만으로도 큰 산이다.


 아직 장애인들의 대대적 반응과 요구가 없기 때문에 사회의 관심은 덜한 듯 하다. 더욱 더 나를 의아하게 만드는 점은 마치 장애가 선천적 장애만 있는 듯이 행동하는 태도이다. 다양한 요인들과 사건들로 인해 후천적 장애도 존재하는 게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가 태어날 때 운이 좋아 불편함이 없었더라도,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게 유지되리라는 법은 없다. 그 누구도 장애의 사각지대에 놓이지 않는다.


 바다에 떠다니는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야자수 잎은 실제로는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날치들이 야자수 잎에 알을 낳고 숨기에 천적인 상어는 침을 흘리는 데 그친다. 이처럼 별로 의미 없다고 생각해도 누군가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도 같지 않을까.


 자신의 삶에 터전에 영향을 미치는 시설에 대해 반응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혐오시설에 장애인 특수학교를 넣어 반대하는 행위는 우리 사회의 각박함과 무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구별하는 태도를 추구했으면 좋겠다. 무조건적인 이해와 양보를 바라는 것 아니다. 다만 나도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었으면 좋겠다.


 또한 자유의 개념은 해방의 뜻을 가진 ‘Free’로만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진정한 자유는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로 이루어진 ‘Liberty’이다. 그러니 자신만의 자유만을 외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의 삶은 런닝머신 위에서 뛰는 것과 같다. 런닝머신 보다 빨리 뛰어 기계에서 벗어난 사람을 보며 우리는 잘못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기계가 제공하는 속도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법, 제도권 밖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현상을 봐야 하는 이유이다.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턱끈 펭귄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자. 우리는 턱끈 펭귄처럼 누군가가 먼저 도전해 상황을 맞닥뜨리고 환경 속에서 한계를 만날 때 그는 패배하고, 좌절하며 생명의 끝자락에 서게 된다. 나머지들은 그 상황을 보고 배우고, 이용하며, 나아가고 이익을 취한다. 먼저 나아간 이들을 통해 우리가 지금 존재한다는 생각을 한다면 희생, 도전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연대의식이 생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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