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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요한 Jul 15. 2021

공자의 가르침 서(恕)

 삶을 살아갈 때, 수많은 사람과 사상이 영향을 준다. 부모님이 행한 가정폭력일 수도 있고, 폐지를 줍는 할머니를 도와주는 학생의 모습을 보고 삶의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다. 사소한 일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 역사를 말하면서 공자를 빼놓을 수 없다. 단순히 4대 성인에 거론된다는 이유만이 아닌, 우리의 주요 역사 중 한 부분인 조선의 시작이었으며, 끝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사상은 보편적이었으며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통치의 이념이 되었다. 


 공자의 삶과 사상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을 얘기하는 것은 차치하고, 그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말해보려 한다. 물론 우리에게 미친 영향을 반추해 더 나은 삶의 지표로 삼을 수 있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공자의 사상을 아는 게 먼저라 생각한다.


 음 이탈 사회란 무엇일까. 뛰어난 음악가는 곡을 연주하기 전에 악보를 보며, 음의 불협화음이나 이탈된 음을 알아낸다. 알아내어 조정하고 바로 잡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음악가는 실제로 연주가 되어야만 알아낸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몇몇 혜안을 가진 자들이 입법이나 정책에 있어 잘못된 점을 지적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의견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아직 실행되지 않았으니 해봐야 안다는 것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아바타’라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은 장애가 있어 걷지 못하지만, 자신의 아바타와 연결이 되면 그곳에서는 걸을 수 있고, 뛸 수 있으며,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단순히 공상과학 영화로 치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인식하지 않을 뿐이지, 매 순간 자신의 아바타를 가상의 공간으로 보낸다. 미래를 생각할 때 자신의 아바타를 만들어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게 한다. 그곳에서 아바타가 목표를 이루면 우리는 그대로 행동하고, 그러지 못한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실패 시 다른 아바타를 보내 새롭게 행동한다. 우리 대신 아바타를 죽게 해, 더 나은 세상을 살아간다.


 단순히 생각만으로도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면 더 하날 나이 없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죽음과 질병과 같은 고통과 슬픔이 존재하고, 다른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는데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느끼게 하는 불공평한 요소가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불행을 만드는 요소가 없는 유토피아 세상이나 천국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기에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인정한 채 더 나은 세상을 살아야 한다.


 서(恕)란 무엇일까. ‘용서하고 절제하는, 더 나아가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우리는 복잡한 이해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잔인하고 이기적인 사람도 있고, 예수와 부처의 삶을 모방하며 한없이 낮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 옳은 것과 좋은 것을 구별하지 못하며 산다. 실없는 말을 하며 타인에게 아물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한다. 


 사고(思考)하기 때문에 타인과의 충돌은 당연하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을 용서하고, 이해하며, 절제하는 자세인 서(恕)를 마음에 지니고 살아야 한다. 서(恕)는 자신을 버림으로써 타인과의 충돌을 막으라는 뜻이 아니다. 각기 다른 환경, 생각, 가치관 등을 가진 우리가 어찌 같을 수 있을까. 오히려 남과 같아지라는 것은 폭력적인 생각이다. 서(恕)는 자신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때, 자신만을 생각하지 말고 공생(共生)하라는 뜻이다. 정지되고 정체된 삶을 살아가라는 뜻이 아니라, 적응과 변화를 하되 타인을 존중하며 더불어 살라는 뜻이다.


 한 기사를 보았다. 노숙인이 길거리에서 노숙했는데, 추운 겨울을 이겨내지 못해 동사(凍死)했다는 내용이었다. 마음이 슬펐다. 동정심이 생겼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그렇게 내가 가진 것을 생각했고, 남은 왜 가지지 않았는지 생각했다. 


 약 100년 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공산주의를 시작하는 신호탄이자, 시발점이었다. 시작은 좋았다. 일시적으로 농업 생산량이 늘어났고 모든 것이 잘 흘러가는 듯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쿨라크(kulak)는 인구의 12.3%였지만 전체 곡물의 50%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이들이었다. 이들의 능력은 탐욕스럽고 약탈하는 이미지로 규정되었다. 그렇지 않은 이들은 피해자이고, 동정을 얻어야 하는 이미지로 규정돼 많은 쿨라크가 처형되고 강제이주 당했다. 능력의 차이는 당연했고 그 결과 생겨나는 불평등은 당연했는데, 아무런 기준 없이 쿨라크는 악으로 규정돼 모든 것이 부정됐다. 중국의 마오쩌둥도 평등의 이름으로 학살을 하였다. 많은 공산주의 국가들 또한 그랬다. 


 많은 이들이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 하에 죽었다. 많은 이들은 자신이 불완전하고 무지한 존재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전체주의적 이념에 의지했다.


 우리는 각기 다른 환경, 재능, 능력 등을 가지고 태어난다. 누군가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 누군가는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타고나지만,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 눈을 감고 귀를 닫으려 해도, 원래 세상은 불공평하고 고통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누군가를 탓할 수는 없다. 


 신(神)을 탓할 것인가. 앞선 공산주의 얘기가 신앙의 관점이 아니었기에 기독교의 얘기를 하자면, 불평등과 고통은 우리의 선조인 아담과 이브가 무화과를 먹어 시작됐다. 신(神)은 어디에도 있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에, 왜 지켜봤는지는 모른다. 정말 몰랐을 수도 있다. 진실은 신(神)만이 안다. 하지만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세상의 불공평과 고통에 살게 하는 것은 신의 뜻이었다. 


 우리는 어떤가. 오직 인간만이 고통을 위한 고통을 줄 수 있다. 분노와 공격성은 잔혹 행위와 대혼란을 초래할 무서운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갈등과 불확실성과 위험이 가득한 시기에도 억압에 맞서고 진실을 말하며 진전할 수 있는 원초적인 힘이기도 하다. 즉, 악할 수 있기에 선할 수도 있다.


 삶은 원래 불공평하고 고통이 가득하다는 것을 공자는 일찌감치 알았다. 그래서 한 말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다. 자신이 변하면, 더 나아가 집안을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고, 나라를 다스리며, 천하를 평화롭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시작이 되는 수신(修身)은 무엇일까. 현실을 부정하고 삶의 조건을 탓하며 원한과 복수심에 매몰되지 말라는 뜻이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자신을 변화하라는 뜻이다. 그리하면 선한 영향을 나, 가족, 친구, 단체, 국가에도 그럴 수 있다는 뜻이다. 안일해 하지 말고 타락하지 말라는 뜻이다. 


 현실의 부정적인 것들은 신이 잘못인가 아니면 우리의 잘못인가? 지금 우리의 삶은 누가 만들었는가. 우리 인간이 만들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우리가 바꿀 수 있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만족스럽지 못한 현재 상황을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동력으로 삼는다. 그런 게 아니라면 성숙하지 못해서 징징거리는 걸지도 모른다. 우리가 컴퓨터 인공지능처럼 병에 걸리지 않고, 고통을 받지 않으며, 불안감에 시달리지 않는 존재라면 귀엽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을 것이다.


 불평등은 위를 바라볼 수 있기에 목표가 되고 동기가 된다. 즉, 불평등과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 수신(修身)의 시작이다.


 우리는 실패하는 방법을 배울 필요 없다. 자신의 인생을 파괴하는 법과 나락으로 가는 방법도 배울 필요 없다. 하지만 성공하는 법과 인생을 파괴하지 않는 법,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배워야 한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수신(修身)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바로 희생(犧牲)이다. 희생은 제사를 지낼 때 바치는 제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즉각적인 보상을 원하는 자아와 더 나은 삶을 살아가려는 두 개의 자아가 있다. 예컨대 즉각적인 반응과 보상을 원하는 자아는 원숭이와 같다. 중대한 문제가 생기면 술을 먹으려 한다. 술을 먹음으로써 문제가 해결되지 않지만 잊으려 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반면 더 나은 삶을 살아가려는 자아는 중대한 문제가 생기면 우선순위를 나누고 어떤 것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정한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희생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가게 한다.


 충동을 자제하고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면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시간과 장소에서 보상을 받는다. 우리의 선조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도 충동적이고 즉각적인 보상과 반응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더 나은 삶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았다. 곡식이나 과일을 그 순간 다 먹지 않고 나중에 저장하면 미래에 본인, 혈연, 부족이 먹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시간이 점차 지나자 자신이 아끼는 소, 양과 같은 동물들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고, 산 사람의 심장을 바치기도 했다. 우리는 현재의 충동을 통제하고 관리함으로써 더 나은 세상을 살아가려 했고, 이루어 냈다. 


 기독교에서는 사탄이 나타나 인간에게 노력과 희생 없이 능력과 재물을 준다고 끊임없이 유혹한다. 반면 야훼는 자식을 갖고 싶다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이루어준 뒤, 그 아들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 잔인해 보이지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야훼도 인간이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결국 자기 아들 예수를 보내 십자가에 매닮으로써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음을 말한다. 


 공부를 하다 보면 친구들과 놀고 싶어진다. 원래 놀고 싶었지만 더욱더 격정적으로 놀고 싶어진다. 안락하고 쾌적한 공부 환경을 위한다며 안 하던 청소를 시작하고, 갑자기 오랫동안 보지 못한 친구가 그리워 핸드폰을 켜 연락을 한다. 내친김에 공부하는 척 사진을 찍어 주위에 천명하기까지 한다. 그러고 나서 반응 확인을 위해 SNS를 수시로 확인한다. 공부는 뒷전이고 다른 행동에 압도되고 만다. 스스로 잘 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공부하려면 친구와 놀고 싶어도 그래서는 안 되고, 환경 탓을 해서도 안 되고, 핸드폰을 켜서도 안 됨을 안다. 나의 원숭이 자아가 말하는 마음의 소리를 미래를 위해 희생해야 함 또한 안다. 


 수신(修身)은 거창하고 어려운 단어가 아니다. 자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라. 더 나은 자신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방을 치우고, 공부하고, 자신을 사랑하라. 자신을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구부정한 길을 걷고 있는지 곧은 길을 걷고 있는지 확인하라. 그리고 자신이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데 쉽다면 경계하라. 희생은 절대 간단하지 않으며 어려움을 수반한다. 사방에 가시덩굴이 있고 바닥에 수많은 뱀이 있는 좁은 길을 걷는 것과 같다. 


 우리는 자신에게 함부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내일부터 게으름을 피우지 않겠어.’라고 굳게 결심해도 다음 날 여전히 빈둥거리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더 나은 자신을 위해 내면을 끊임없이 빈틈없이 돌아봐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미 믿고 있고, 알고 있는 것만 고집하여,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삶만 살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다 보면 점차 자신에게 여유가 생긴다. 무언가를 이루어 낼 것이고 진취적인 자세를 갖게 된다. 그렇게 점차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 자신의 가족, 친구를 위해서 행동하고, 더 나아가 점차 이해관계가 없는 이들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수많은 불평등과 고통을 하나씩 해결해 나갈 수 있다. 남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길의 시작은 나 자신을 바로 잡고 사랑하며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


 잘못된 희생에 대한 견제 또한 필요하다. 공산주의, 국가주의와 같은 파괴적인 이데올로기가 유지되고 자행될 수 있었던 이유는 침묵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며 희생을 요구했다. 잘못됨을 알았지만 누구도 권력과 죽음 앞에 말하지 못했다. 침묵했고 살인에 동조했다. 침묵하면 실제로 행한 사람과 구별할 수 없다. 나도 체제를 동조한 일원이 된다. 그렇게 좋은 것과 나쁜 것에 차이를 두지 않았고, 아무것도 할 필요 없게 만들었다. 가치의 차이가 없으니 의미의 차이가 있을 리 없다. 


 서(恕)를 행하고 싶다면,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는 허술한 논거와 야망을 실현하려는 책략은 버리고, 누구라도 보고 평가할 수 있도록 자신을 완전히 발가벗겨 드러내야 한다. 무의미한 희생을 하지 마라. 그리고 침묵하지 마라. 말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고 선(善)의 시작이다. 자신의 양심에서 나오는 발언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칠 때 미리 알려주는 표지판이다. 이로써 타인도 자신의 진실 된 생각을 말함으로써 서로 합의 하며 교정하고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 간다. 복잡한 상황에서 공통점을 찾고 합의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진실한 대화를 할 때 불편한 감정을 인정해야 한다. 타인과 대화할 때 생기는 원망, 두려움, 외로움, 절망, 지루함, 좌절, 증오를 인정하게 된다면 오히려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 쉬워짐은 물론이거니와 더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행위는 결국 훗날의 나 자신과 공유하는 행위니 두려워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음 이탈 사회에 산다. 해결 방법은 간단하면서도 쉽지 않다. 서(恕)다. 서(恕)는 고통과 불평등을 인정하고, 자신을 바로 잡기 위해 희생하는 것이다. 여유가 생긴다면 다른 사람을 도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신과 대화함과 동시에 타인과도 대화하는 것이다. 충돌을 두려워 말라. 앞선 얘기를 잘 지키고 있다면 자신에게 여유가 있기에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여유 또한 있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자존감과 자신감이 있다. 내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고 도와주는 선(善)과 옳은 일을 할 수 있다. 음 이탈 사회에 살아감에 있어서 원만한 이해관계 조정과 더 나은 삶을 만들 수 있다.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고, 천국을 만들 수 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해 내는 것에 스스로 놀라기도 하고, 우리가 모르는 것을 생각하기도 하는 능력과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스스로 과소평가하지 마라.


  삶은 불공평하고 고통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원망만을 하거나 허무주의적인 삶을 살 것인가. 옳고 그름도 없고, 의미도 없는 비관주의로 가득 찬 삶을 살기보다는, 서(恕)를 행함으로써 더 나은 나를 위해, 더 나은 삶을 위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의미를 지고 변화하고 진취하겠는가.


 치과에서 고통을 참으면 더 나은 삶이, 윤택하고 달콤한 삶과 음식이 존재한다. 굳이 치과에만 이러한 진리를 극한 시킬 필요가 있을까. 고통이 문제가 아니라, 고통의 의미가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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