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몽상가들>(2003)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제론(Thematics)이란 “주제, 모티프 및 상징연구나 주제 읽기에 근거한 비평이다.”(한국문학평론가협회, 866). “주제론은 예술작품 내에서 인식될 수 있는 참조 재료(소재)와 개념적 재료(주제)를 가리킨다.”(Richard Rushton & Gary Bettinson, 190). 여기서 말하는 소재는 작가가 예술작품을 제작할 때, 창작 결과물의 원료가 되는 내용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하나의 그림을 완성시키는데 필요한 물감, 붓, 도화지와 같은 물리적인 요소일 수도 있으며 그림에 대한 영감, 감정, 생각과 같은 추상적인 요소일 수도 있다. 이러한 소재들은 주제라는 표현을 이루게 된다. 주제는 예술작품에서 물리적인 요소로 보이지 않는다. 작가가 예술작품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사상이 예술작품을 보는 관객에게 전달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단지 하나의 개념으로 인지될 뿐이다. 이렇게 인지된 개념이 예술작품에 대한 관객의 비평으로 이어지고, 예술작품은 유기물로서의 생명력을 얻게 된다. 결국 예술작품의 생(生)은 소재와 주제의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영화라는 예술작품에서도 소재와 주제가 존재한다. 영화를 보고난 관객들은 작품에 대해 저마다의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영화의 어떠어떠한 소재가 별로였다.’, ‘어떤 배우가 연기를 잘한다.’, ‘연출적인 요소는 좋았으나 어떠어떠한 이유 때문에 이야기 자체는 별로였던 것 같다.’는 식의 비평을 한다. 그 이유는 영화의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화감독은 수많은 소재를 촬영, 조명, 미술, 사운드, 편집 등으로 나타냄으로써, 영화의 완성본을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관객에게 전달되기를 바랄 것이다. 물론 관객마다 영화를 보고난 후의 생각은 다르겠지만, 영화의 주제가 불명확하게 전달된다면 영화는 제기능을 다하지 못한 것이고 그 영화는 생명력을 잃게 된다. 이처럼 영화의 주제는 감독이 영화를 한마디로 함축하는 단 하나의 결론과 같은 것이다.
주제론이라는 항목 하에서 연구되는 두 개의 또 다른 개념은 도상(icon-ography)과 모티프(motifs)이다. 이 둘은 모두 작품 내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요소로서 기능하기 때문에 영화의 형식을 지탱하는 구조적 원리로서 역할을 하기에 적합하다(Richard Rushton & Gary Bettinson, 191). 도상이란 가장 일반적인 용법에 따라 말하자면 단지 이미지, 형상 혹은 닮은 꼴이다. 그것이 표시하는 것과 비슷한 기호이며, 종종 그것이 표시하는 물체와 동일시된다. 도상과 그 지시체(referent)와의 비슷함은 회화적일 수도 있고, 아니면 도상과 그것이 표상하는 물체가 공유하는 것은 - 예를들면 모양같은 - 어떤 특징일 수도 있다(한국문학평론가협회, 486). 모티프란 예술 창작 혹은 표현의 제작 동기, 원동력을 뜻한다. 모티브는 적용되는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예술가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작품을 창작하게 하는 대상이나 체험, 표현의 의도가 유발되는 테마나 소재를 가리키기도 한다. 또는 작품에 표현된 내용의 중심을 이루는 제재(題材)나 문양을 포함하기도 한다(월간미술, 143). 즉, 도상과 모티프라는 개념을 영화예술에 접목시키면, 도상은 이미지라는 시각적인 요소이고, 모티프는 도상으로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창작의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개의 요소는 영화의 주제를 직간접적으로 표현하며 감독이 관객에게 말하는 일종의 언어와 같은 것이다.
영화 <몽상가들>의 배경은 ‘68혁명’이 일어난 1968년 5월 프랑스 파리이다. 이 영화는 ‘매튜’, ‘테오’ 그리고 ‘이사벨’의 이야기이다. 세 명은 집 밖으로 잘 나가지 않고 거의 집에만 머문다. 그들은 그들만의 세상에서 스스로를 가두며 평화로움을 즐긴다. 하지만 파리의 길거리는 온통 시위하는 사람들로 즐비하다. 길거리는 그들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집 밖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이 영화에서 그들이 왜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는지, 왜 화염병을 던지는지, 더 나아가 영화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이해해기 위해서는 68혁명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한다.
68혁명은 1968년 5월, 파리 근교의 낭테르 대학교 학생들이 미국의 베트남 침략과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항의하는 시위에서 시작되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파리 사무실을 습격한 대학생 8명이 체포되자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대규모 항의시위가 이어지고 여기에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겹치면서 기성세대와 국가 권력에 저항하는 혁명으로 발전하게 된다. 프랑스 전역에 권위주의와 보수체계 등 기존의 사회질서에 강력하게 항거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이는 남녀평등과 여성해방, 학교와 직장에서의 평등, 히피운동 등 사회전반의 문제로 확산된다. 68혁명은 독일과 미국, 일본 등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사실 프랑스에서 68혁명의 전초전은, 1968년 2월 당시 문화부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가 프랑스 시네마테크의 창설자이자 수장인 앙리 랑글루아를 해임하고 국립영화센터(CNC)를 통해 시네마테크를 장악하고자 하는 시도에 수많은 영화인들이 반발하며 파리에서 대규모의 시위를 벌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이민호, 79).
<몽상가들>은 68혁명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영화라고 스스로 증명한다. 영화 속에서 그 당시 누벨바그(nouvelle vague)의 중심에 섰던 ‘장 피에르 칼폰’, ‘장 피에르 레오’ 등이 실제 시위하는 모습을 촬영한 영상이 몽타주(montage)로 나온다. 영화의 장면(칼라)과 과거의 실제 장면(흑백)이 교차편집 되면서 감독은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68혁명이 일어난 1968년과 영화가 개봉한 2003년의 도상이 동일 선상에 서게 된다. ‘모두 일어섭시다!’, ‘자유를 사수합시다!’, ‘시네마테크를 지켜야합니다!’를 외치는 영화 속 인물들은 영화 속 가상의 인물일 수 있고 1968년에 목소리를 냈던 사람들일 수 있으며 영화를 관람한 관객일 수도 있다. 감독은 이 몽타주를 통해 68혁명을 바라보는 주관적인 진정성을 제시한다. 이는 감독의 사상을 뒷받침하는 모티프라고 할 수 있으며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교차편집 몽타주는 영화의 중간중간에도 힘을 잃지 않고 표현된다. 아니, 표현된다는 수동태가 아니라 표현한다는 능동태가 맞을 것 같다. 감독은 과거 1968년 전에 개봉했던 영화들을 회상한다.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 찰리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 조세프 본 스텐버그의 <금발의 비너스> 등은 매튜, 테오, 이사벨을 통해 재현되기도 하고 토론거리가 되기도 하며 게임거리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몽상가들>의 주인공 세 명은, 감독의 그 시절 영화에 대한 열망과 사랑을 대신 표현하며 감독 스스로가 시네필(CinePhile)이라는 것을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셈이다.
68혁명은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충돌에서 일어난 신세대의 사회변혁운동이다. <몽상가들>에서 신세대와 대적하는 기성세대는 여러 부류이다. 신세대의 시위를 직접적으로 대면하고 방어하는 경찰일 수도 있지만 <몽상가들>의 주인공들이 대면하는 가장 가까운 기성세대는 테오와 이사벨의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테오와 이사벨의 부모이자 자식들을 키우는 집 안의 가장이다. 베트남 전쟁 반대 서명을 하지 않고, 시를 쓸 뿐 정치적 서명에는 관심이 없다. ‘탄원서는 시이고, 시는 탄원서이다.’라고 외치는, 시인이라는 직업의 사명감만 다하는 인물이며 테오와 이사벨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뒷전의 인물이다.
아버지와 자식들간의 갈등은 매튜가 테오와 이사벨의 집에 초대받아서 그들의 부모와 같이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고조된다. 매튜는 그들의 아버지에게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을 하지 않는다고 꾸지람을 듣는다. 그리고 아버지의 화살은 테오와 이사벨에게 향한다. ‘떼거리로 데모나 하면 뭔가 다 뒤집히고 새 세상이 올 걸로 착각하잖아!’. 아버지에 말에 테오는 반박한다. ‘영화관 문 닫는데 보고만 있어요? 이민자들은 쫓겨나고 친구들이 경찰한테 얻어터지는데도?’. 테오와 아버지는 감정 싸움을 멈추지 않고 서로 지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테오는 말한다. ‘전 아버지처럼 되기 싫어요!’. <몽상가들>에서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와 혁명의 중심에 있는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는 테오의 설전은,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충돌을 대표하며 영화의 전체적인 주제에 입각한다.
아버지는 여행 때문에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자식들에게 필요한 수표(手票)를 건네는 은행(銀行)의 역할을 한다.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건넨 돈은, 화해의 의미도 아니고 미안함의 의미도 아닌 그저 상황을 무마시키기 위한 아버지만의 권력을 의미한다. 돈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물질이지만, 그 물질보다 중요한 것이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라고 외치는 이들이 68혁명의 시위자들이다. 기성세대가 신세대에게 건네준 물질은 신세대에게 그저 담배값과 술값이라는 유흥을 즐기는데 사용된다. 이는 기성세대의 물질만능주의적인 사고방식을 풍자하고자 하는, 감독의 주제론의 재료 중 하나이다.
68혁명에서 성(性)에 대한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1968년의 젊은이들은, 성이란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 기성세대와는 달리, 성의 개방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 수단이라고 믿었던 것이다.”(오제명 외, 44-45). “급진적인 성 해방에 대한 이러한 열망은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한 젊은이들끼리 자신들만의 이상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하는 의지로 연결되기도 했다.”(이선우, 206). <몽상가들>에서는 성(性)의 본연(本然)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매튜와 테오 그리고 이사벨은 자위와 섹스 같은 성 행위에 부끄러움이 없다. 본인들의 성기(性器)를 드러내며 수많은 행위를 행하고 심취한다. 이는 그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결합(結合)이며, 그들만의 유토피아(utopia)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의식(儀式)이다.
영화에서 성기를 드러내는 일은 감독의 주제론에 입각한 연출 의도이다. 영화에서 성기를 드러내는 일은 분명 쉽지 않은 연출이다. 드러낸다 하더라도 명확한 모티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영화 속 성기는 분명 관객이 보는 강렬한 도상이기 때문이다. <몽상가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행하는 성 행위는 분명 파격적이다. 테오와 이사벨은 남매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옷을 벗고 한 침대에 누워서 자거나 자위를 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들의 성 행위는 스스럼없으며 오히려 어느 연인보다 자연스러움을 보인다. 이러한 파격적인 행위는 관객의 입장에서 일반적인 성 행위라고 생각하기엔 어려우며, 감독은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모티프와 68혁명의 시발점을 교집합으로 묶는다.
“68혁명의 직접적인 동기는 정치도 경제도 아닌 일상 속 성 억압에 대한 반발이었다.”(이선우, 206). 섹스에 대한 개방(開放)은 68혁명의 주제 중 하나였으며, 테오와 이사벨은 68혁명의 시위자들의 성에 대한 고찰을 대표한다. 그들의 개방성은 제3자인 미국인 매튜에게 전이된다. 매튜는 처음에 테오와 이사벨 남매의 개방성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국가 문화에 대한 차이가 아니며, 단지 그들의 사상 자체가 특이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매튜는 테오와 이사벨의 사상에 취함(?)을 당하게 된다. 처음에는 이사벨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섹스를 성 자체로 즐기게 된다. 그리고 셋은 유토피아라는 도상을 완성시킨다. 혼자가 아닌 셋이서 함께 비싼 와인을 마시고, 이사벨이 만든 엉망진창의 요리를 먹으며, 작은 욕조에서 거품 목욕을 즐긴다. 각자만의 예술에 대한, 사상에 대한, 사회에 대한 생각은 유토피아의 소재이다. ‘우리 셋은 거의 집밖에도 안 나갔고 밤낮 구분도 못할 지경이 됐다. 이 세상엔 우리 셋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매튜의 이 독백은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완성시켰다는 증거이다. 제3자인 매튜가 어느새 테오와 이사벨, 그리고 68혁명과 교집합으로 묶이게 된다.
이들의 결합은 영화의 후반부에서 완성된다. 셋은 이사벨이 만든 천막으로 둘러쌓인 침실에서 나체 상태로 잠자리에 든다. 침실은 성에 대한 관계가 이루어진 곳임과 동시에 그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유토피아이다. 그곳에서 그들의 성취감은 극에 달하고 평온한 잠을 이룬다.
하지만 그들의 유토피아는 테오와 이사벨의 부모님에게 들통이 나고, 이를 눈치 챈 이사벨은 자살을 시도하지만 창 밖에서 날아온 시위대의 벽돌 때문에 그 시도마저 물거품이 된다. “이들이 자신들만의 작은 세상에서 성적 놀이와 지식의 향유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파리의 거리는 이미 68혁명의 물결로 술렁이고 있었다. 깜깜한 영화관 스크린 위 이미지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던 이 시네필들의 머릿속에서 현실은 영화의 이미지로 대체되고, 영화(상상)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된다.”(이선우, 210). 그들의 유토피아 밖에서는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혈투가 일어나고 있었다. 68혁명에 대한 진중함을 잊은 채 유토피아에서 서로를 즐기고 있었던 이들의 사상이 다시 한 번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 거리로 나가 시위대와 하나가 된다.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기성세대를 향한 반발 혹은 잠시 잊고 있었던 욕망이 분출하며 ‘혁명은 우리의 것, 동지여 단결하라!’를 외친다. 하지만 매튜는 화염병을 던지는 폭력적인 방법의 시위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결국 매튜와 남매는 갈라서게 된다. 매튜가 시위대를 뒤로 한 채 쓸쓸히 걸어가는 장면 뒤에는 테오와 이사벨의 뜨거운 사상이 화염병과 함께 폭발한다. 매튜와 테오 그리고 이사벨이 함께 했던 시간은 결국 혁명의 과정 중 일부로 남게 된다. 매튜는 다시 제3자의 입장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남매와 함께 했던 기억에 대한 연결성이 이어지며 테오와 이사벨은 프랑스의 젊은이로써 68혁명에 중심이 된다.
“경찰이 닥치는 족족 사람들을 공격한다. 총 574명이 체포된다. 3백명은 쏘르본느에서 274명은 인근 거리에서 붙잡혔다. 뒷날 콘벤디트는 당시 경찰서 분위기가 시시각각으로 살벌해지던 상황을 묘사했다. 한 경찰관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며 보복을 공언했다. 다른 경찰은 한술 더 떴다. “꼬마야, 너는 댓가를 치를 거야. 아우슈비츠에서 네 부모랑 같이 뒈지지 않은 게 유감이야. 요새는 그럴 수가 없거든””(Ingrid Gilcher-Holtey, 2009). 68혁명의 주역이었던 다니엘 콘벤디트(Daniel Cohn-Bendit)는 68혁명의 일부분을 회상했다. 이는 68혁명의 권력자들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감독은 <몽상가들>의 세 명과 함께 68혁명을 이끌어나간다. 영화를 파리의 신세대의 시선으로 보던 감독은, 입장(立場)에 대한 개연성을 철저하게 지킨다. 영화를 보고난 후, 시네필이었던, 파리를 사랑했던, 술과 담배를 좋아했던, 본인만의 사상이 존재했던 그리고 혁명의 중심에 있었던 감독의 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유토피아를 꿈꿨던 감독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기 보단 68혁명에 대한 주관적인 사상을 영화를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영화에서 반복되며 등장했던 도상과 모티프는, 결국 영화의 테오와 이사벨의 화염병으로 결실을 맺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주제론”, 『문학비평용어사전』, 국학자료원, 2006.
“모티프”, 『세계미술용어사전』, 월간미술, 1999.
“도상”, 『문학비평용어사전』, 국학자료원, 2006.
Richard Rushton & Gary Bettinson, 『영화이론이란 무엇인가?』, 이형식 옮김, 명인문화사, 2013.
오제명 외, 『68, 세계를 바꾼 문화혁명 : 프랑스 · 독일을 중심으로』, 서울 : 길, 2006.
Ingrid Gilcher-Holtey, 『68혁명, 세계를 뒤흔든 상상력』, 정대성 옮김, 창비, 2009.
이선우, 「2000년 이후 프랑스 영화에서 68세대를 회상하는 관점」, 『프랑스문화예술연구』, 67집, 2019, pp.195-226.
이민호, 「부정의 부정이라는 교육학 68혁명과 영화이론」,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15권, 3 호, 2018, pp.66-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