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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버섯 Oct 10. 2023

너에게 닿을 수만 있다면

내 이야기 속 주인공

아빠는 다리를 약간 절었다. 내가 갓난아기였을 때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한쪽 다리가 굽혀지지 않아 늘 다리를 펴고 앉았고, 손가락 하나도 마찬가지로 접을 수 없었다. 장애 등급이 나올 정도는 아니라 혜택은 없 반면, 직장을 갖는 데 어려움은 있었다.

아빠는 택시를 몰았다. 배움이 많지 않고 사지가 '멀쩡'하지 않은 아빠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을 거다. 불편한 다리로 운전하는 일은 고역이었으리라. 아빠는 자주 차를 세웠고 술을 마셨다. 알코올 의존이 심했고 아무렇지 않게 폭력을 휘둘렀다.


짐작하기 어렵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불우했고 궁핍했고 외로웠다.


작가가 되고 싶었다. 내 안에서 자꾸만 쏟아지는 이야기를 문학이 아니고는 풀 데가 없었다. 명예욕이 있었던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좋아하는 일로 돈벌이를 하고도 싶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곳에 닿고 싶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아빠를 홀로 감당해야 하는 아이에게, 고작 돈 몆백 원 없어 고개를 숙인 채 분식집을 지나치는 아이에게 , 곁에 어른다운 어른이 없어 최소한의 돌봄도 받지 못하는 아이에게 망한 글로나마 다가가 가만 앉아 있다 오고 싶었다. 잠깐이라도 웃게 하고 싶었다. 울고 싶을 때 실컷 울도록 해 주고 싶었다. 찰나라도 잊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작가의 길은 멀고, 내 글이 아이들에게 닿을 날은 까마득해 보였다. 그래서 네이버 지식인에 들어갔다. 가서 어린이들의 질문에 답을 달았다. 학원을 다니고 싶은데 밤늦게까지 일하는 엄마에게 차마  얘기를 꺼낼 수가 없다며 학원비는 얼마쯤 하냐고 묻는 질문부터  새엄마가 밥을 많이 안 줘서 배가 고프다는 글까지, 질문의 형식을 취했지만 실은 아픔의 고백인 글들에 울음을 삼키며 답을 달았다. 나의 댓글이 결코 답이 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너무 뻔해서 정말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이것밖에 없는지 환멸을 느끼면서도 댓글을 달았다.


한 번은 ㅈㅎ라는 자음으로 적힌 글이 올라왔다. 지읒 히읗이 뭘까 생각하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공부할 게 너무 많은데 다 못 하면 부모님이 무섭게 야단치고 잠을 못 자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ㅈㅎ를 해봤는데 너무 아팠다고 했다.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고작 초등학생일 뿐인 어린이가 자해라니. 아이를 그 지경으로 몰고 간 것들을 생각하면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절대로 자신의 몸을 아프게 하지 말라고 최대한 담담하게 댓글을 달았다. 이번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너무 없어서 힘이 빠졌다. 그럼에도 나는 세상의 모든 질문이 올라온다는 그 창을 닫을 수 없었다. 여기 너의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네 얘길 들어주는 단 한 사람이 있다는 것 그 한 가지를 알려주고 싶어서 나는 또 뻔한 댓글을 달고 다녔다.


아직도 난 잘 모르겠다. 슬픔을 간직한 자들이 마음껏 울 수 있도록 하는 게 좋은 건지 아니면 조금이나마 웃을 수 있게 하는 게 좋은 건지. 한 가지 분명한 건, 아픔을 모르는 얼굴로 낄낄거리기만 하는 이야기는 내가 쓸 수 글이 아니란 사실다. 나의 어린이들은 울면서도 웃는다. 웃다가도 문득 서러운 얼굴이 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날이 있다는 걸 내가 알기 때문이다. 주인공들! 다른 작가를 만났으면 마냥 신나고 즐거운 일 많았을 텐데 이런 나라서 미안해. 미안한 일만 많아지는 망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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