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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하정 Sep 11. 2023

206호

걱정마, 여름이 코앞이야

‘당신 없는 여름이 가고 또 당신 없는 겨울이 다 갔습니다.’ 외관이 낡은 빌라에 들어서 몇 계단을 오르다 보면 왼쪽 벽에 적힌 낙서 같은 문장이 쓰여 있다. 휘날리듯 쓰인 진한 글씨에 쓸쓸함이 묻어있다. 계단을 오르며 쓴 글일까, 계단을 내려오며 쓴 글일까. 나는 매일 이 문장을 지나쳐야만 집에 도착하고, 집에 도착하면 문장 속의 가버린 여름과 겨울이 머릿속을 맴돌며 집안으로 함께 들어온다.지금 현관에는 너 없는 계절을 살게 될 내가 서 있다. ‘계단에 쓰인 문장 말이야, 생각해 보면 너무 쓸쓸하지 않아?’ 하고 물었을 때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꼭 안아주던 너. 이내 사라진 너.


덩그러니 남겨진 집 안 구석구석을 휘저으며 창문을 열었다. 오래 방치되어 먼지가 쌓인 싱크대 앞 작은 창문을 먼저 열었다. 해가 드리우는 시간보다 넘어가는 시간에 오래 머무르는 거실 창도 열었다. 꽃무늬 쉬폰 커튼이 참 오랜만에 휘날린다. 후덥지근한 공기 사이로 서늘한 밤공기가 살결을 스친다. 양팔에 솜털이 잠깐 솟는다. 네 향기였던가, 여름 향기였던가. 바람이 불면 그리운 네가 따라 들어온다. 잠깐은 외롭지 않다.


너는 같이 고른 노란 패브릭 소파를 좋아했다. 그 자리에 앉아 기타를 치기 시작하면 나는 드럼 치듯 박자에 맞춰 테이블을 타닥타닥 두드렸다. 그러다 이내 일어나서 춤을 췄다. 너는 직접 만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지. 나는 네 목소리에 맞춰 몸을 살랑살랑 흔들다가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네 목소리를 들었다. 그때 부른 노래 제목이 뭐였더라? 네가 처음 노래를 들려주던 날, 수줍게 말하던 제목이 아무리 떠올려도 생각이 나질 않아 답답했다. 분명 기억 나는 건 가사에 영원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왔다는 거.


기억이 나질 않아 여름엔 더 서글퍼졌다.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굳은 다짐이었을까. 영원한 건 없다는 네 마음이었을까. 그 후로는 사랑할 것이 없어졌다. 전부인 것 같았던 너는 여름 오자마자 떠나고, 네가 없어서 여름도 사랑할 수가 없어졌다. 당신이 들려주던 영원의 노래는 이제 나를 위한 노래가 아닌 게 되었다.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네 악보가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린다. 그제야 정신이 든다. 여전히 텅 빈 집 한가운데에 서 있다.


벽면에 쓰인 문장은 올라가는 길에 쓰인 게 분명해졌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꼭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무겁다. 그러니 글을 쓴 누군가도 나서는 길보다 들어오는 길이 지옥이었을 테지. 쓸쓸한 206호에도 결국, 너도 없고 네 노래도 없는 여름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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