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석류의 빛깔> 리뷰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감독의 1969년작 <석류의 빛깔>은 기존의 영화 서사 방식에서 벗어난 예술적인 영화로 아르메니아의 위대한 시인 사야트노바의 일대기를 다룬다. 영화는 논리적인 줄거리나 대화보단 정적인 화면, 강렬한 색채, 종교적·민족적 상징으로 채워진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소 불친절하고 기괴하게 느껴질 수 있는 영화의 연출 속에 시각적 수수께끼와 민족적 비극의 상징이 곳곳에 녹아있다. 특히 이 작품은 검열로 인한 훼손과 필름 보존의 어려움을 겪었으나,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노력으로 2014년 복구를 성공하여 관객 앞에 다시 펼쳐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영화는 줄거리가 명확하지 않다. 사야트 노바의 인생과 그의 시를 펼쳐내며 개인의 생애를 서사보다 상징과 색채로 구성해 간다. 민족의 생사가 달린 이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삿된 것에서 '우리의 것'을 지키는 것이다. 수많은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 순수성을 지키고 고유성을 지키는 일이다. 어쩌면 헌신적인 사랑에 대한 허상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엔 순교를 강요받고 일방적인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지만 여전히 순수하고 능동적인 신념은 이곳에도, 저곳에도 있었다. 숭고한 삶이 아닌 그저 살아가는 삶을 바랐지만 그는 종교적 숙명을 받아들이고 영적인 중개자로 나선다. 또한, 예술가로서의 삶을 포기함과 동시에 완성시키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석류가 퍼지는 것으로 시작하는 장면이나 양피지를 말리는 장면은 눈길을 사로잡는다. 마치 피가 스며드는 것처럼 그들의 비극을 예고한다. 외세의 침략과 민족문화를 잠식하는 현실에 맞서 이들은 종교적 의식을 거행하기 시작한다. 허나 종교적 실체는 희미하며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시인의 헌신은 숭고하나 당장의 현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목적 없는 고통이 아닌 능동적인 신념을 통해 예수가 떠난 후, 고난 속에서도 우리는 신앙과 민족을 지켜냈다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자긍심과 영적 영속성을 드러낸다. 석류는 금단의 열매의 의미지만 아르메니아 민족의 상징으로는 숭고, 다산, 풍요, 생명력을 뜻한다. 그런 아르메니아의 상징이 으깨지는 부분은 민족정체성이 훼손되는 것으로 투영되지만 알갱이는 남아있다는 점에서 꺼지지 않는 생명력과 회복력을 암시한다.
영화는 마치 짜인 극본처럼, 연극처럼 그려진다. 논리적인 서사와는 거리가 먼 '예술적인 영화'다. 1969년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영화는 세련되고 독창적인 언어를 구사한다. 영화는 대사보다는 화면으로 드러내는 것이 '주'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일정한 행동규범 안에서 활동하고 어떠한 표정도, 말도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반복한다. 그 모습이 다소 기괴하게 느껴지는 것은 영화의 연출 자체가 감정을 절제하고 노래나 기도, 의식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상황은 더욱 절망적이게 표현되지만 이 설정을 알지 못하는 관객에게는 다소 불친절하게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 직접적이고 불편한 설정이 외면하지 말고 마주 보라는 의도로 작용하기에 의미가 있다. 내면의 고뇌와 혼란을 드러내며 낯섦과 이질감의 구조를 보여준다.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여 꿈이나 환각 같은 설정이 이어진다. 마치 정신착란이 일어나는 것처럼 복잡한 화면들이 겹쳐지고 또 반복된다.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대규모 고난과 비극은 고통의 무의미함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