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가장 가까운 사이인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한다는 건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언젠가 레즈비언 지인분이 이런 얘기를 해준 적이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커밍아웃을 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수많은 과정 (고민, 용기, 판단, 예상 등)을 나의 가족도 나와 동일시되어 내가 커밍아웃을 한 후에 똑같이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
친구들을 생각했을 때만 하더라도 비교적 경미한 수준으로 적용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친구 A에게만 커밍아웃을 했을 때, 같이 아는 다른 B, C, D,.. 에게 A는 나에 대해서 숨기고 모르는 척을 해야 한다. 언젠가 친구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같이 알고 지내는 한 친구가 자꾸 내가 왜 남자친구가 없냐고 물어봤다는 것이다. "걔 연애 생각 없어." "걔 너무 바빠서 연애 못한대." 등의 갖은 거짓말을 생각해 내며 상황을 빨리 종료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족은 어떨까? 같이 아는 수많은 친척과 지인, 직장동료들 등 딸의 안부 (그냥 안부면 좋겠지만 한국 사회는 남들에게 너무 관심이 많다. 연애, 결혼, 공부, 직장 등 궁금한 것이 너무 많다.)를 묻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대화를 회피하거나 마음속으로 괴로워하면서 거짓말을 해야 할 것이다.
본인은 아직 부모님에게 커밍아웃을 하지 못했지만 약 3년 전 혈육에게 정말 뜬금없이 전화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주변에서 결혼에 대한 얘기와 그로 인한 압박,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라는 고민에 괴로웠을 때이다. 평소에 사이가 좋은 부모님과 첨예한 갈등을 겪기도 했다. 남자와 장기연애를 하고 상처를 받아 더 이상 누군가와 인생을 함께 하고 싶지 않고 혼자 살고 싶은 딸로 취급받는 것 같아 답답했다. 부모님은 딸이 "왜 한국 사회는 연애를 안 하면 하자 있는 사람으로 취급해? 왜 이렇게 정상성에 집착해?"라는 날 선 공격에 벙쪘을 것이다.
어느 날 밤 당시 만나고 있던 여자친구에 대한 고민, 나의 성지향성 및 미래에 대한 고민에 너무 괴로워 맥주 네 캔을 홀로 들이마시고 외국에 살고 있는 혈육에게 다짜고짜 전화를 걸었다. 그러곤 얘기하면서 울었다. 이 커밍아웃은 돌이켜보았을 때 최악이었던 것 같다. 항상 나의 고민을 얘기하고 조언을 얻는 사이이기에 감정적으로 모든 것을 말했던 것 같은데, 나의 혈육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했을 것이지만, 나의 혈육은 울면서 커밍아웃을 하는 동생에게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너를 항상 서포트해 주겠다고 말했다. 부모님이 내가 사람을 안 만나는 것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부분을 자기가 이제 커버해 주겠다고 했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찾아가라고 했다.
모든 게 잘 된 줄 알았다. 나를 서포트해 주는 가족 한 명이 있다니 라는 생각에 마음의 엄청난 안정을 얻었고 행복했다. 하지만 나의 혈육은 그 시기 많이 괴로웠다고 한다. 부모님이 나중에 알면 어떡하지? 두 입장 모두 상처받지 않게 내가 중간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지? 나의 동생의 삶이 앞으로 정말 힘들 텐데 내가 무엇을 해줘야 하지?라는 생각을 오랜 시간 거쳤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여자친구에 대해 물어봐주지 않고 전혀 못 들은 얘기인 듯하는 나의 혈육에게 점점 불만이 쌓여갔다. 본인도 내가 했던 고민을 수없이 하고 있었음을 그 당시에는 인지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얼마 전 아주 의미 있는 통화를 한 적이 있다. 혈육은 나에게 무엇이든지 어떤 방식으로든지 너를 서포트해 줄 테니 우리 같이 친한 사이에 알게 모르게 존재했던 벽을 부수고 싶다고 했다. 엄마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싶다고 얘기했더니 나는 이제 말해야 하는 시점이고, 엄마는 이제 이걸 알아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자기가 어떻게 하면 도와줄 수 있을지 물어봐주었다. 이 대화를 통해 십 년 묵은 어떠한 것이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비로소 내가 혈육에게 진정으로 이해를 받는 느낌이었다. 나를 동일시하며 힘들었을 나의 혈육에게 정말 감사하고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결정을 내렸다! 부모님이 내년에 나와 내 혈육을 보러 방문할 때, 엄마에게 둘만 시간을 갖자고 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브런치 글을 읽으라고 하는 것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내가 인생에서 힘든 순간, 좌절했다고 느끼는 순간 늘 "괜찮아, 넌 최선을 다한 걸 이 엄마는 알고 있어"라고 말해주던 그녀의 반응이 나 또한 궁금하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며 내 마음 또한 단단히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준비를 하고 있다. 언제 유튜브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부모는 보통의 방식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기에 원망하지 말 것. 그들은 그들이 살아온 보통의 방식에서 그것이 최선이라고 믿고 나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만에 하나 이해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원망하지 않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