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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서, 매실 항아리 안으로

매실청 담그는 망종 절기

by 글방구리

우리 집엔 혼자서는 들기도 버거운 커다란 '다라이'가 세 개 있어. 이 '다라이'라는 말을 별로 쓰고 싶지 않은데, '함지박'이나 '믹싱볼' '대야'라고 쓰면 그 이미지가 딱 떠오르지 않는 것 같아서. 어쨌든 그 다라이는 김장을 담그고 나면 보자기에 꽁꽁 싸여 창고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데, 요맘때 딱 한 번 보자기를 벗고 외출하는 날이 생겨. 바로 망종 절기, 매실청 담그는 날이지.


주문해 놓은 매실을 기다리며 설탕도 미리 구입하고, 항아리 상태도 살폈어. 같은 항아리로 된장도 담그고 매실도 담그다 보니, 항아리 관리하는 게 좀 번거롭긴 해. 그래도 플라스틱 통이 아닌 항아리에 담가 놓으면, 햇살과 바람이 맛을 더해 줄 것 같아 더 안심이 되지. 한 알 한 알 꼭지를 따고, 물기를 닦고, 설탕에 버무려 차곡차곡 담고, 한지로 덮어 내놓았으니 올해도 잘 부탁해!


김장을 하거나 된장을 담그거나 매실청을 담글 때면, 내가 왠지 제법 철든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져. 온도와 분량을 정확하게 재기보다는 눈대중이나 경험칙을 더 따르는 나로서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맛이 들기를 기다리지. 잘 안 되면 그걸 버리고 다음 날 다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한 해 농사를 완전히 망치는 거니까. 그러나 이웃이나 친지에게 나눠도 부끄럽지 않을 만한 맛이 들었다고 여겨지면 정말 기분이 좋더라? 내가 했지만 내가 한 것 같지 않고, 내가 하지 않았지만 내가 한 거라는 생각. 교만하게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협업을 한 것 같은 느낌인데,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내 삶도 그렇게 바라보고 싶어져. 내 삶이지만 보이지 않게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과 협업해서 하루하루를 살고 싶다는.


매실 항아리 뚜껑을 덮기 전에 한지를 찾다가, 지나간 달력 한 장을 찢어서 덮었어. 새해 첫 달에 축복을 가득히 담아 달라는 기원을 담아 썼던 글 '담다'가 어울려 보여서.

망종 절기에는 성령강림 대축일도 있었지. "Veni Creator, Spiritus!" 하고 노래했듯이 항아리 반들반들 닦으며 노래하고 싶네. 오소서, 성령이여, 햇살로, 바람으로, 사랑으로, 기쁨으로! 제 삶 안으로, 그리고 매실 항아리 안으로!

꽃씨 봉투에 '꽃양귀비' 1000립이 들었다고 했는데, 양귀비는 딱 한 송이가 피었다. 나머지는 코스모스 같다. 천 개 중에 하나 있으니 잘 찾아서 심으라는 거였나?
핫립세이지는 올해도 화단을 빠르게 채워가는 중. 분홍 낮달맞이에서 열일하는 꿀벌도 반갑고, 색이 변하는 수국꽃도 반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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