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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이 뭔 죄가 있겠냐마는

입술에 묻은 밥알도 무겁다는 대서(大暑)

by 글방구리

텃밭에 화가 나 있었어.

벌에 두 번이나 호되게 쏘였거든. 한 번은 방과 후 아이들이 가꾸는 텃밭에서였고, 또 한 번은 내 텃밭에서였지. 두 번 다 왼쪽 종아리.


처음엔 이랬어. 아이들이 관찰일지를 쓰는 동안 난 옆에서 아이들의 그림을 지켜보고 있었지. 통이 넓은 긴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바짓가랑이 속에서 뭔가 펄럭거리는 느낌이 들더라. 살짝 따끔했던 것도 같아. '모기에 물렸나?' 했는데 침 자국이 또렷했어. 시간이 지나며 물린 곳 주변부터 벌겋게 붓기 시작하더니 점차 종아리와 허벅지까지 땡땡해졌어. 독이 혈관을 타고 번지는 걸 실시간으로 볼 수 있더군. 굉장히 아프고 가렵더라. 얼음팩을 바꿔가며 쉼 없이 냉찜질을 했어.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심하면 쇼크도 온다던데. 아니, 호흡기 쪽도 아닌데 이까짓 걸로 뭘 병원까지...' 머릿속에서 갈까 말까 고민만 하면서 사나흘 지냈지.


그 후 몇 날 며칠 폭우가 쏟아졌어. 비가 잠깐 소강상태를 보이던 날, 붓기도 가라앉았기에 우리 밭으로 부추를 베러 갔어. '비 오는 날에는 부침개지.'라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부추 한 움큼만 가위로 자르고 고추 몇 개 따 올 건데 뭘, 하면서 입고 있던 반바지 차림에 장화만 신고 갔는데, 다리 맨살은 얼마 내놓지도 않았건만 그 짧은 사이에 무릎 오금을 쏘고 간 거야. 그러곤 얼음찜질과 병원에 갈까 말까, 똑같은 반복. 응급처치도 고민도 똑같았는데 처음과 달라진 게 하나 있지. 그 후 나는 텃밭에 완전히 등을 돌렸다는 것.


'남들은 일부러 봉침도 맞는다는데 뭘. 이렇게 냉찜질만으로 잘 가라앉았으니 다행이야.'

'반바지 입고 간 내 잘못이지 누굴 탓해.'

'밉다면 날 공격한 벌을 미워해야지, 텃밭이 뭔 죄가 있다고.'

부기가 가라앉으니까 화도 좀 누그러지더라. 불볕더위에 방치됐던 앞마당 꽃들도 축축 늘어지고 누렇게 타들어가는 걸 보니, 텃밭에 심어둔 고추와 가지, 들깨와 고구마도 마음에 걸리는 거야. 그래, 물이라도 주고 와야지.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다시 긴 바지를 꺼내 입었어. 그리고 짧은 거리지만 텃밭까지 걸어가면서 깨달았어. 나는 벌을 핑계 삼아 텃밭에 화를 내고 있던 게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걸.


그래, 거기에 엄마가 있었어. 이십 년 전, 밭에서 썩어가는 여름 무가 아까워 밭일을 하다가 쓰러진 엄마. 그 길로 세 번째 심장 수술을 받으러 입원한 엄마에게 그까짓 무가 뭐라고, 그게 뭐 아깝다고 힘들게 일했느냐고 얼마나 쏘아붙였던가! 텃밭에서 땀을 비 오듯 흘리거나, 풀을 뽑다가 잠깐 현깃증이 나거나, 벌에 쏘여 다리가 퉁퉁 부었을 때도 내 마음속에는 한더위에 밭에서 쓰러져 다시는 밭으로 돌아가지 못한 엄마처럼 내게 감당하지 못할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던 거야.


초복 중복 다 지나고 8월에 접어들었어. 며칠 후면 처음으로 저 먼 하늘 끝에 가을 기운이 일어선다는 입추가 오겠지. 삼복에는 입술에 묻은 밥알도 무겁다지. 밥알 붙은 입술뿐 아니라 마음도 많이 무거운 요즘이야. 폭우에 산들은 무너져 내리고, 폭염에 땅이 지글지글 끓고 있잖아. 우리는 이런 날씨를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 걸까? 끝내 감당하지 못해서 모든 걸 다 놓아야 하는 그 순간까지 나는 과연 내 시간을 잘 걸어갈 수 있을까? 시들고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가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도라지꽃 보겠다고 씨앗 잔뜩 뿌렸지만 올해는 실패. 가지꽃으로 만족하자. 작물도, 사람도 불볕더위에 타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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