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멈추게 한 불편한 순간들
요즘 범이가 보이지 않는다. 차의 시동을 켤 때면 주문처럼 외웠더랬다. 제발 오늘은 범이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그랬던 범이가 당최 보이지 않으니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어디 아픈가? 돌아가셨나?’
범이는 우리 동네 사람이다. 이름이 '범'이라 그런가 호랑이처럼 눈이 부리부리하고 덩치가 크다. 뒤에는 짐을 실을 수 있게 커다란 짐칸이 달린 세발자전거를 삐그덕 삐그덕 타고 다닌다. 밤길에 만나면 무서울 것 같기도 한 외모에 목소리는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 크다.
내가 굳이 그를 아침 출근길에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출근길에 지나가야 하는 일방통행로가 있기 때문이다. 차량 한 대가 지나갈 좁은 길이라 동네 사람들은 눈치껏 서로 양보하면서 이용하지만, 범이만큼은 절대로 비켜주지도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아니, 비켜주기는커녕 자기 자전거와 마주치게 되는 차량 운전자에게 냅다 욕을 퍼붓는다. 자기 화가 다 풀릴 때까지.
그의 이름이 범이라는 것은 근처에 있는 포도농장 할아버지로부터 알게 됐다. 나는 이 동네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지만 할아버지는 이 동네에서 사신 지 40년이 넘었다고 했다. 포도를 사면서 슬쩍 물었다.
"어르신, 왜, 그분 있잖아요. 세발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아무한테나 욕하고 소리 꽥꽥 지르는~"
"아, 범이?"
"그분 이름이 범이예요? 그분은 왜 맨날 그렇게 화를 내세요?"
"걔가, 좀 모자라잖아. 동네 사람들한테 하도 욕하고 다니면서 지랄을 해서, 다들 뭐라 해도 안 돼. 걔도 벌써 오십이 넘었을 낀데."
할아버지는 오랜만에 말 거는 손님이 반가웠는지, 땅콩도 몇 뿌리 뽑아가라며 인심을 쓴다. 고마운 마음으로 땅콩을 캐는 동안 토박이 할아버지에게 동네 이야기를 물었다.
“요기서 조기까지는 젤 먼저 됐구, 조기에서 또 조~~오기까지는 그다음이여. 저~~ 짝에 보이는 아파트 저건 들어온 지 얼마 안 됐구.”
부동산 일타강사처럼 수십 년 마을 개발 역사를 단번에 읊은 할아버지는 범이를 물어보았던 것 때문인지 이런 말도 덧붙였다.
“우리 마을 사람들이 인심 좋다는 말도 듣지만 텃세도 꽤 심한 편이여. 범이네도 식구들이 다 성치 않으니 농사도 못 짓고 그러고들 살지.”
할아버지는 범이가 왜 늘 화가 나 있는지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범이가 화내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여긴 원래 범이네 동네였고, 자기 길이었던 거네. 자기가 평생 마음대로 돌아다니던 길이었는데, 못 보던 사람들이 들어와 빵빵거리니 그게 화가 났던 거네.'
그렇다고 범이가 옳다는 건 아니다. 그 길이 사실은 그의 것도 아니었으니까. 자기가 먼저 사용하고 있었다고 해서 그가 독점할 사유재산은 아니니까.
내가 사용하고 있을지언정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이라고 여긴다면 나도 범이처럼 날마다 화를 내며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나무를 가득 덮은 나뭇잎들이 지금은 나무의 것들로 보여도 때가 되면 떨어져 버리듯, 지금 내 것처럼 사용하고 있다고 해도 때가 되면 털어 버릴 줄 알아야 내 삶에도 화가 나지 않을 텐데.
그나저나, 범이는 어찌 된 거지? 살아는 있는 걸까?
#우리가기다린건바로우리다 #나를멈추게한불편한순간들 #알라딘 #알라디너 #사계절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