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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받은 상처를

아이의 글로 치유받는다

by 글방구리

"얘들아, 안녕!"

큰소리로 인사를 하며 들어선 방과 후 터전. 아이들도 큰소리로 인사하며 화답한다. 그런데 뒤이어 바로 들려오는 소리.

"종이배! **오빠가요, 오늘 종이배 아파서 안 왔으면 좋겠대요! 글쓰기 하기 싫다고요."

갑자기 떨어진 기온보다 더 차가운 바람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간다.

놀고 싶은데 책상 앞에 바르게 앉으라고 하는 글쓰기, 자극적이고 짧은 동영상 시청과는 달리 재미없는 책을 함께 읽거나 힘들게 글을 쓰라고 하는 시간. 교사가 아무리 즐겁게 진행하려고 머리를 짜낸다고 해도 원천적으로 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게 글쓰기 수업이기는 하다. 마치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가야 하는 학교처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파서 안 오길 바라다니. 이건 좀 서운한걸.'

그래도 문제 삼을 말은 아니다. 아프라는 악담을 들은 거야 속상하지만, 글쓰기가 얼마나 하기 싫었으면 그리 말했을까 싶었으니까. 보이지 않는 데서는 나라님 욕도 하는데 아이가 그 정도 뒷담화야 할 수 있지.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세 아이가 똑같이 증언을 하는데도 **이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잡아뗐다. 이제 초점은 '악담'이 아니라 '거짓말'로 넘어간다.


나는 아이들이 놀면서 크기를 바라는 공동육아 교사였다. 열 살까지는 그 어떤 사교육도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고(물론 예체능 등 선천적 재능을 보이는 아이들은 예외지만), 내 아이들 역시 그렇게 키웠다. 그런데 아이들이 초등 4학년이 되면 부모들은 아이들을 놀리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공동육아 방과 후에 남기를 불안해한다. 교사회도 이런 부모들의 불안감을 충분히 이해하기에, 4학년만의 특별한 학년활동을 고민한다.


이 아이들에게 '박물관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일 년 동안 공을 들인 것도 그런 이유였다.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허투루 시간을 보내지 않으려고 고민하고 연구했다.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알 수도 없고, 그 흔한 '좋아요' 피드백 하나 받지 못해도 부모들과 교육 내용을 공유하기 위해 다달이 평가서를 써서 올렸다. 나로서는 이 수업에 나름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다. 다른 학년 수업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지만, 특별한 애정과 노력을 기울였던 수업이었다.


물론 4학년만 아니라 어느 학년이든, 방과 후 학년활동으로 하든 사교육 활동으로 하든, 글쓰기 수업을 할 때 아이들에게는 이런 말을 공통적으로 한다.

"글쓰기는 정답이 없어. 맞고 틀리는 게 없단 얘기야. 그런데 자기 마음을 정직하게 써야 해."

사람 앞에서 말을 할 때는 본심을 감출 수도 있고, 포장을 하거나 에둘러 말해야 할 때도 있다. 과장이나 거짓이 섞이기도 한다. 그러나 글을 쓰려고 공책을 펴면 거울처럼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거짓 없이 마주 대할 수 있다. 나는 아이들이 글쓰기를 하면서 정직함이 글뿐 아니라 몸에도 깃들기를 바랐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나중에 들었지만) 부모에게는 거짓에 거짓을 더 보태 말했다는 **이의 태도가 어젯밤 내내 참 아팠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아무 일이 없었던 듯이 진행된 글쓰기 수업은 달력에 특별히 의미 깊은 날을 만들어 써보는 주제였다. 김희동 선생님의 [절기달력]에 나와 있는 모든 특별한 날들을 아이들에게 읽어주었다. 백 개가 족히 넘었다. 아이들은 "세계 왼손잡이의 날이라는 것도 있어요? 그럼 왼발잡이, 오른발잡이의 날은요?" 하면서 웃었다.

나는 대부분의 날들이 다수보다는 소수의 인권, 힘 있는 존재보다는 힘없는 존재를 위해 만들어져 있다고 말해 주었고, 좋은 목적을 위해서 그날만큼은 더 노력해 보자는 뜻으로 제정된 날도 있다고 설명했다. 아이들에게는 다섯 개 정도 만들어 보라고 했다.


재활용의 날, 종이 절약의 날, 공장 멈추는 날 등 환경과 관련된 이슈도 있고, 공부 없는 날, 숙제 없는 날 등 자신들의 힘듦과 바람을 해결하고 싶은 주제도 보인다. 그중에서도 내 눈에 띄는 건, 아이다운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수현이의 글이었다.

1. 나는 1월 24일에 '세계 돈 안 쓰는 날'을 만들고 싶다. 왜냐하면 계속 돈을 쓰면 세계 경제에 문제를 줄 것 같아서 그렇다.
2. 4월 27일에 '전기 절약의 날'을 만들고 싶다. 왜냐하면 전기를 우리가 너무 많이 쓰면 지구 온난화의 원인이 될 것 같아서이고, 전기가 없어서 빛이 없었을 때 살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불편했는지 생각해 보라고 만든 거다.
3. '세계 유가족의 날'을 7월 3일에 만들고 싶다. 왜냐하면 유가족을 위로해야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아지게 하려고 하는 날이다.
4. '세계 막내의 날'을 12월 31일에 만들고 싶다. 왜냐하면 막내가 누나랑 형 때문에 나이차로 지금도 짜증 나는데 막내도 누나랑 형한테 반말을 할 수 있는 날이다. 이유는 막내도 반말을 할 수 있게 하고 싶어서이다.
5. 나는 5월 13일에 '다쳐서 죽는 사람 없는 날'이다. 이유는 죽는 사람이 많아지면 무덤이 차지하는 공간이 많아져서 죽는 사람이 많으면 인간이 멸종할 수도 있어서이다. 다 죽지 말자는 말은 아니고 조심하자는 말이다.

수현이의 글을 읽으니 수현이가 막내로서 느끼는 속상함과 억울함이 내게도 전해져 왔다. 수현이의 가정 상황을 대충 알고 있는 나로서는 수현이가 막내이기에 누리는 특권이 얼마나 많은지도 짐작할 수 있고, 수현이의 누나는 '세계 누나의 날'을 만들어서 수현이를 마음껏 때려주고(?) 싶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다쳐서 죽는 사람 없는 날'을 만들며 "다 죽지 말자는 말은 아니고 조심하자는 말이다"라고 쓴 부분에서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래, 이런 게 아이다움이지. 이런 글 읽으려고 수업을 하는 거지.'

아이에게 받은 상처가 이렇게 아이가 쓴 글로 살살 나아지고 있다. 글쓰기 선생한테는 솔직한 아이의 글이 만병통치, 효과 만점의 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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