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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Oct 11. 2021

전라도 손맛 시어머니의 숨겨진 비법

지난 추석에는 일 년 하고도 9개월 만에 부모님을 만나러 갔다. 부모님들과 우리 부부가 모두 2차까지 백신 접종을 완료한 상태였다. 다른 형제들과 의논해서 한가족씩 부모님들을 방문하기로 했기 때문에 불안한 가운데도 마음 편하게 부모님과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시댁으로 가는 길, 거의 2년 만에 만나러 가는 길이 이상하게 긴장이 되었다. 조금 쑥스럽기도 하고 어색할 것 같아서 불편하기도 했다. 마치 오래전에 헤어진 연인을 만나러 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부모님을 만나자마자 사라졌다. 차를 주차하고 짐을 챙겨 나오는데 이미 시아버님이 주차장으로 나오셨다. 우리 차가 오는 것을 창문으로 보고 나오신 것이라고 했다. 아마 우리가 도착할 무렵부터 창밖을 보고 계신 것 같았다. 오랜만에 오는 아들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이 느껴져서 마음이 뭉클했다.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반갑게 반기시는 시어머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몇 번의 명절과 생신, 어버이날을 만나지 못하는 동안 훌쩍 커버린 손자를 보고 많이 놀라셨다. 어머님은 우리가 온다고 이것저것 맛있는 음식들을 준비하신 것 같았다. 어머님의 음식은 항상 맛있다. 전라도가 고향인 어머님의 손맛은 언제나 최고다. 오랜만에 어머님의 음식을 먹을 생각하니 현관을 들어서기도 전에 갑자기 배가 고파왔다.


"배 많이 고프지야? 내가 꽃게탕 한솥 끓여놨는데 입에 맞을지 모르겄다."


꽃게탕이라는 말에 입에 침이 고였다. 어머님의 꽃게탕은 정말 대한민국에서 제일 맛있다. 어느 식당에서도 어머님의 꽃게탕보다 맛있는 꽃게탕을 먹어본 적은 없었다. 사실 어머님이 만든 요리는 다 맛있다. 언젠가 추석에는 어머님의 열무물김치를 외국인 형님(어머님의 첫째 며느리)과 자리에 앉지도 않고 밥도 없이 손으로 한참을 집어먹은 적도 있었다.


꽃게탕과 함께 양념게장도 만들어놓으셨다. 어머님의 양념게장은 정말, 우주 최강이다. 사실 나는 간장게장은 입에도 안 대고, 양념게장도 식당에서는 잘 먹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어머님의 양념게장은 없어서 못 먹는다. 비린맛도 없고, 양념이 얼마나 맛있는지 남은 양념도 싹싹 긁어서 먹는다.


아들은 꽃게탕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살을 발라줘야 했었는데 이제 혼자서 게살을 잘 발라먹는다. 국물을 한입 먹어보던 아들, 와 국물이 달아요 라며 밥을 국물에 말아먹는다. 먹을 줄 안다. 내가 가르치지 않았지만 잘 배운 분이다.


점심을 거하게 꽃게탕으로 먹고, 저녁은 생선으로 먹자고 하셨지만 우리는 남은 꽃게탕만 있으면 된다고 국물만이라도 괜찮다고 했다. 어머님이 넉넉하게 끓인 꽃게탕을 다시 저녁으로 먹었다. 다시 먹어도 마치 처음인 것처럼 감동이었다.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과식을 부른다는 것이다. 배가 부르게 먹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어머님 동네에 있는 커다란 재래시장 구경을 갔다. 그렇게 배 부르게 먹었는데도 시장 먹거리는 군침이 돌았다. 우리 동네에는 없는 시장, 그 시장에서만 먹을 수 있는 난 먹거리들을 아쉽지만 포기하게 만든 것이 어머님의 꽃게요리였다.


"어머님 꽃게탕 정말 맛있어요.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에 어머님 꽃게탕이 제일 맛있는 것 같애요."

"에고 말이라도 고맙다. 뭐 별다른기 들어가냐. 남들 넣는 것 넣지."


예전에는 어머님의 높은 손맛에 기죽어서 어머님 앞에서 음식 할 때는 바짝 얼어있었다. 실수할까 봐 긴장해서 말도 잘 못했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서인지 고부간에 시간이 쌓여서인지, 아니면 코로나로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어머님과 마치 모녀처럼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갑자기 어머님이 노트 하나를 꺼내오셨다.

"이기 꽃게탕에 들어가는 재료들이제. 별다른 것 들어간다냐."

어머님께서 내오신 것은 꽃게탕 레시피였다. 그 뒤에는 장아찌 비법, 간장게장 양념게장 비법까지 그동안 어머님의 밥상을 맛깔나게 했던 음식들의 레시피가 담긴 노트였다.

"이대로 넣으면 다 맛나제. 우선은 꽃게를 잘 사야겄지만."


나는 핸드폰을 꺼내서 어머님의 레시피를 찍었다. 나중에 꼭 해 먹어 보고 싶어서였다.

"에고 해필 글씨를 못 생기게 쓴 거를 찍냐."

어머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수줍게 웃으셨다. 어머님의 요리를 배우고 싶어서 사진을 찍어가는 며느리에 대한 뿌듯함과 혼자만 보려고 아무렇게나 쓴 글씨에 대한 부끄러움이 담긴 웃음이었다. 그렇게 웃는 어머님의 얼굴이 귀여웠다. 어머님은 한참을 어머님의 요리책에 담긴 비법들을 알려주셨다. 좋은 꽃게를 고르는 방법과 손질 방법까지. 내가 꼭 만들어먹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만들 만큼 자세히 알려주셨다.


"어머님은 무슨 음식이든 뚝딱 잘 만드시는데도 이렇게 적어두시는 거예요?"

"아 까먹을까 봐 그러지. 요새는 자꾸 잊아뿌니까. 이렇게 안 적어놓으면 재료가 빠지고 그러더라."

"저는 어머님은 그냥 다 맛있게 잘 만드시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레시피대로 만드시는지 몰랐어요."

"이렇게 꼼꼼하게 적어놓고 빼먹지 않고 재료가 들어가야지 맛이 나제."


결혼 17년 만에 전라도 손맛, 시어머님의 숨겨진 비법을 알게 되었다. 꼼꼼하게 손질법까지 적어두신 어머님의 요리책을 어머님이 드디어 손맛 부족한 둘째 며느리에게 공개하신 것이다. 그로부터 어느새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장바구니에 꽃게를 담아두고도 사지 못하고 있다. 꽃게 손질이 자신 없으면 좋은 냉동꽃게를 사라고 하신 어머님의 말씀에도 선뜻 꽃게탕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어머님의 레시피가 있어서 든든하다. 언제든지 어머님의 손맛이 담긴 꽃게탕을 나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용기가 생겼다. 어머님께서 수줍게 적어주신 비법노트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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